'월급쟁이 사장'은 노동자일까 아닐까 [법알못 판례 읽기]

2021. 9. 14. 06: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명목상 대표'의 유족 급여·장의비 지급 거부한 근로복지공단 패소

[법알못 판례 읽기]

게티이미지뱅크



이름만 ‘사장’ 혹은 ‘대표’인 노동자들을 둘러싼 노동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일을 하다 다치거나 그로 인해 사했을 때도 과연 이들이 ‘노동자’인지를 다투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모습이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라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급을 받으며 직함만 ‘사장’이라면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업무상 재해 입으면 월급 받는 사장도 ‘노동자’

최근 ‘월급쟁이 사장’도 업무상 재해를 당한다면 노동자로 인정해 유족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9월 초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부장판사 유환우)는 사망한 A 씨의 배우자가 “유족 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하지 않은 결정을 취소하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A 씨는 한 패러글라이딩 업체의 사내이사 겸 대표였다. 그는 2018년 11월 1인용 패러글라이딩 비행 도중 추락 사고로 숨졌다. 이에 유족은 유족 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A 씨가 회사 대표자로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라고 볼 수 없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원래 회사 대표는 A 씨의 손아랫동서였지만 사고가 있기 4개월 전 사업자등록상 대표가 A 씨로 변경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건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행정법원의 재판부는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A 씨는 회사의 형식적·명목적 대표자이지만 실제로는 사업주인 B(손아랫동서) 씨에게 고용된 노동자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 것이다.

무늬만 사장이라면 사실상 ‘노동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회사 운영과 관련해 비교적 고액의 비용이 지출되거나 인력을 고용하는 등 업무에 관해서는 A 씨가 B 씨에게 보고했고 의사 결정은 B 씨가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B 씨가 2018년 7월 A 씨를 고용한다는 내용의 ‘전문경영인 근로계약서’를 썼던 사실, B 씨가 회사 주식의 40%를 보유한 최대 주주인 것과 달리 A 씨는 주식을 보유하지 않은 점 등을 판단 근거로 삼았다.

반박도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은 “A 씨가 개인 비행자격증 취득을 위한 비행 도중 사망했다”는 논리를 펼쳤다. “업무와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는 일로 사망했기 때문에 유족 급여를 지급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법원은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B 씨는 법정에서 ‘회사의 전문 파일럿 4명 중 2명이 이직하기로 돼 있어 A 씨의 자격증 취득이 필요했다’고 진술했다”며 “A 씨로서는 개인 비행자격증을 빨리 취득할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명목상 사장’인지 여부가 주요 기준

앞선 경우와 같은 판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실제로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등기로는 ‘명목상 대표’로 봐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이 대표적이다.

2020년 2월 서울행정법원은 모 회사의 대표이사로 등기돼 있던 E 씨의 사망 후 그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 급여 등을 지급해 달라”고 낸 소송에서 유족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E 씨는 2017년 6월 자택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커튼과 부자재 등을 제조·판매하는 회사의 대표이사로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E 씨 가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유족 급여를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근로복지공단은 “E 씨가 매주 52시간 이상 근무했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회사의 대표이사이므로 노동자가 아니다”고 봤다. 결국 E 씨 유족은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법원의 판단은 공단과 달랐다. E 씨가 대표이사로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실제 경영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E 씨의 대표이사 직위는 형식적일 뿐이며 의사 결정 권한을 갖고 있는 실제 경영자는 따로 있었다”며 “이에 따라 E 씨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노동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E 씨의 명함에 찍힌 공식 직함이 ‘대표이사’가 아닌 ‘영업이사’인 점도 고려했다. 회사 직원들이 E 씨를 ‘이사님’이라고 부르며 영업 업무만 담당한 것으로 안다고 말한 사실도 포착했다. 실제 경영자라고 여겨져 왔던 F 씨의 진술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F 씨가 “회사를 실제 경영한 것은 자신”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그는 “E 씨의 금융 거래상 신용도가 좋아 대출에 유리해 대표이사로 등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비록 E 씨가 회사 주식을 일부 갖고는 있었지만 이 때문에 노동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돋보기]

 

 ‘무늬만 부사장’도 퇴직금 받을 수 있을까?

월급쟁이 임원진을 둘러싼 법리 다툼은 퇴직금의 영역도 피해 갈 수 없다. 여기서도 ‘정해진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장뿐만 아니라 부사장 등의 경영진으로 불렸다고 해도 고정 급여를 받았다면 퇴직금을 받아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있다.

2020년 6월 대법원은 보험계리사 A 씨가 근무하던 보험계리법인을 상대로 낸 퇴직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서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부사장’이라고 불린 A 씨의 손을 들어주고 회사에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판단한 것이다.

A 씨는 2005년 4월 B 사에서 프리랜서 신분으로 일했지만 매일 정시에 출퇴근하고 매달 20일 일정한 월급을 받았다. 급여는 근로소득이 아닌 사업소득으로 처리됐다. 회사의 4대 보험에도 가입되지 않았다. 이후 회사의 지분을 보유하게 된 A 씨는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실제 경영에 관여한 바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A 씨는 2017년 퇴사하면서 B 사에 퇴직금 6500만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B 사는 A 씨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며 지급을 거부했다. 1심은 A 씨가 재직 중 사실상 노동자 신분이었다고 봤다. 이에 B 사에 퇴직금 33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매일 정시에 출퇴근하며 매달 고정 급여를 받았다는 점에서 급여는 형식상 사업소득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근로에 대한 대가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해당해 회사로부터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A 씨가 B 사의 지분을 보유해 사원총회 등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기간은 퇴직금 산정 기간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봤다.

반면 2심은 A 씨를 노동자로 볼 수 없다며 1심 판결을 취소하고 A 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A 씨가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불렸고 회사 경영 사정을 이유로 급여를 스스로 줄이기도 하는 등 노동자의 일반적인 모습과 차이가 컸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대법원은 다시 원심의 판결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A 씨가 부사장으로 불렸지만 포괄적인 권한을 갖고 스스로 독립적인 업무를 하지 않았고 경영에 관여하지도 않았다며 A 씨가 사실상 노동자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부사장 호칭 등은 명목적인 것에 불과하고 A 씨는 실질적으로 B 사에 대해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노동자 지위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안효주 한국경제 기자 joo@hankyung.com

Copyright © 한경비즈니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