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맹질 먹으러 가자”

김민희, 요리강사·‘푸른 바당과 초록의 우영팟’ 저자 2021. 9. 14.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주에서 명절날 꼭 상에 올리는 음식이 있다. 간장 양념한 돼지고기를 꼬치에 꿰어 굽는 돼지고기 적갈(산적). 고기가 귀했던 옛날부터 지금까지 제주의 중요 의례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과거 제주에는 몇몇이 돼지를 잡아 나누는 ‘돝추렴’이라는 풍속이 있었다. 추렴은 평소에도 할 수 있었지만 명절 제사상에 돼지고기 적갈을 반드시 올려야 하기에 추석이나 설을 앞두고 돝추렴 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추렴한 고기는 손질에 품은 많이 들지만 싸고 양이 많은 데다 갓 도축한 고기의 감칠맛이 풍부했다.

일러스트=김도원

할머니는 명절을 앞두고 물질을 나가 제수(祭需)용 구쟁기(뿔소라)나 뭉게(문어)를 잡아오시곤 했다. 구쟁기는 망사리 가득 잡아와도 다듬어 놓으면 야속할 정도로 양이 적지만, 불 내음을 입혀 노릇노릇 구워내면 짭짤하면서도 입맛을 당기는 바다향이 일품이었다. 식구는 많고 양은 적다 보니 다들 먹고 싶어도 눈치만 봤는데, 남동생은 접시에서 구쟁기와 뭉게만 쏙쏙 빼먹어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곤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은 맛볼 수 없기에 더 애틋한 명절의 맛이다.

제주에서도 육지처럼 추석에 송편을 빚는데, 제주도 송편은 둥글납작한 보름달 모양이다. 화산섬인 제주는 물을 가두기 어려운 화산재 토양이라 벼농사가 어렵다. 쌀밥은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었고, 쌀가루로 빚는 떡은 정말이지 먹기 힘들었다. 하여 추석 때만이라도 넉넉히 먹자는 의미로 송편을 둥글고 크게 빚었다는 설이 있다.

제주에서는 명절(맹질/멩질)을 ‘지낸다’ ‘쇤다’ 하지 않고 ‘먹는다’고 한다. 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환경 탓에 일 년 내내 밭농사를 짓고 겨울에도 말과 소를 먹일 촐(꼴)을 베러 다녀야 했다. 힘들고 배고픈 일상 속 단 하루 풍족하게 먹을 수 있던 날이 명절이었기에 제주 사람들은 손꼽아 명절을 기다렸다.

요즘은 지천에 먹을 게 넘치다 보니 추석이라 하여 대대적으로 상을 차리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명절이란 가족이 모여 밥 한 끼 먹는 날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로 한동안 제주에 못 갔는데 이번 추석에 실로 오랜만에 고향에 가게 됐다. 우리 집 꼬맹이들에게 이렇게 외쳐봐야지. “맹질 먹으러 제주 할머니 집 가자!”

김민희, 요리 강사·‘푸른 바당과 초록의 우영팟’ 저자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