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군의 인권과 삶]차별의 발견과 국회의 시간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2021. 9. 14.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한 여성이 경력직으로 버스회사에 지원서를 냈지만 배우자가 없다는 이유로 접수조차 거절당했다. 버스운전을 배우자와 함께하는 것도 아닌데 배우자 유무는 물을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는 ‘직접차별’에 해당한다. 중증 청각장애인 A씨가 B회사의 신입사원 채용에 응시하려고 하는데, 지원자격 중 ‘TOEIC 600점, TEPS 480점 이상의 영어능력시험점수’를 적어야 한다면 이는 ‘간접차별’에 해당한다. 중증의 청각장애인은 아예 듣기 시험을 칠 수가 없다. 형식적으로는 공정한 시험 기회를 주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차별이 되는 경우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이런 사례는 어떤가? 연구원으로 회사에 입사한 직원은 부사장으로부터 “하루 3회 운동할 것(오전 6시까지 출근하여 운동 바람), 운동 후 항시 보고할 것” “체중감량 못할 경우 퇴직 조치”와 같이 체중감량을 강요받았다. 이런 경우는 ‘괴롭힘’에 해당한다. 체중감량이야 개인이 선택해서 할 일이지 회사 상사가 강요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 여성 직원이 회사 메신저상에서 상사와 다른 남성 직원들이 자신과 동료 여직원에 대해 욕설 및 성적 비하 표현이 담긴 대화를 나눈 것을 발견했다면 이런 사례는 ‘성희롱·성적 괴롭힘’에 해당한다. 그리고 “매년 1~2월이 되면 고등학교와 학원들 앞에 이른바 ‘명문대’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게시”하는 경우는 ‘차별을 조장하고 광고하는 차별행위’다.

위에 든 사례들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만든 소책자 <2021 차별금지법, 평등의 약속>에 소개된 것들이고, 이 책자는 누구나 접속해서 내려받을 수 있다. 위에 든 사례들에 대해서 국가인권위원회는 모두 차별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위에서 들었던 예들 외에도 우리 생활 곳곳에 차별은 넓게, 깊게 존재한다. 어떤 경우는 너무 오랫동안 당연히 그래왔기 때문에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일도 허다하다. 그래서 차별은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직접차별, 간접차별, 괴롭힘, 성희롱·성적 괴롭힘, 차별표시·조장 광고’를 하지 못하게 하자는 취지로 만들려는 법률이 차별금지법·평등법이다.

벌써 14년,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위한 국회의 시계는 멈춰 있다. 이번 국회에서도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이 지난해 6월 말에 법안을 입법발의했고, 올해는 더불어민주당의 이상민, 박주민, 권인숙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다. 더욱이 지난 6월에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요건인 10만명 동의를 받아서 국회 법사위원회에 입법 청원이 되어 있는 상태다. 장혜영 의원이 법안 발의한 지 1년3개월 동안, 그리고 국민동의청원이 제출된 지 3개월 동안 국회 법사위에서는 법안 심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런 중에도 차별금지법·평등법을 제정하기 위한 시민들의 발걸음은 멈춘 적이 없다. 지난 8월에는 코로나19가 엄중한 상황에서도 온·오프라인에서 전국을 돌면서 시민공청회를 했고, 9월1일부터는 매일 온라인 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모이지 못하게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온라인에서라도 농성을 하는 것이지만, 매일매일 풍부한 프로그램들이 선을 보이며 진화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스님들은 열흘 동안 가을 장맛비를 맞으면서 30㎞의 거리에서 오체투지를 단행했다. 기독교와 천주교 단체들이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모임’(평등세상)을 최근에 발족했다.

지난 14년 동안 여야 거대정당은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핑계를 고장난 녹음기처럼 틀어왔다. 과잉 대표되는 일부 보수 기독교 세력의 압력이 거세다는 이유로 곤란하다던 말도 변하지 않았다. 그럴 거면 정치는 왜 하는지 묻고 싶다. 정치는 필요하면 사회적 합의도 만들어가는 과정이고, 헌법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국가와 사회를 재조직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국회가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뒤로 한없이 미뤄오면서 결국은 차별과 혐오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정치 포기행위다. 그러는 과정에서 차별과 혐오에 울던 이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언제까지 편견에 사로잡힌 일부 보수 기독교 세력에 발목 잡혀서 국회 본연의 임무를 방기할 것인지 묻고 싶다.

차별금지법·평등법을 제정할 것인가? 차별세력에 힘을 실어줄 것인가? 더 늦기 전에 국회는 멈춰진 시계를 돌려야 한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