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으론 상대 화났는지 몰라".. 외교가 '하이브리드 외교' 모색[인사이드&인사이트/최지선]

최지선 정지부 기자 2021. 9. 1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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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시대 외교환경 급변
호주 외교-국방장관 접견하는 文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방한한 호주 머리스 페인 외교장관과 피터 더턴 국방장관을 접견하고 있다. 양국은 수교 60주년을 맞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코로나19 상황에도 대면회의를 결정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최지선 정치부 기자
《 “마지막으로 출장 나간 게 언제야?”

요즘 외교부 직원들 안부 인사에서 빠지지 않는 질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지 어느덧 1년 반이 지나면서 국민 개개인 일상은 송두리째 바뀌었고 정부 업무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외교부는 그중에서도 직격탄을 맞았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올해 공개 화상회의를 11번, 1·2차관은 14번 할 만큼 외교부 고위급 당국자도 대면회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가 간 관계도 인간관계와 비슷해서 자주 만날수록 손발이 맞는다. 외교관들은 “화상회의 10번보다 대면회의 1번이 훨씬 유익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공무상 방문이어도 아직 자가 격리 면제가 되지 않는 나라가 많다. 현장 방역지침 때문에 동선도 한정적이다. 출국도 어렵지만 도착해서도 일정을 알차게 채우기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이 때문에 코로나19 사태 이후 상대국 카운터파트와 한 번도 대면 협의를 하지 못한 본부 외교관이 많다고 외교부 당국자는 전했다.

하지만 한국이 처한 외교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미중 경쟁이 격화되면서 한국은 높아진 국제사회 위상에 걸맞은 책임을 요구받고 있다.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복원도 시급한 과제다. 외교부 당국자는 “코로나19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대면과 비대면, 이 두 가지를 섞은 ‘하이브리드 외교’를 총동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
○ 화상회의가 ‘뉴노멀’ 된 외교가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비대면 외교는 ‘뉴노멀’이 됐다. 8월 진행된 아세안 연쇄 외교장관회의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전체 화상으로 이뤄졌다. 특히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은 북한이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는 다자 안보포럼이다.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외교장관이 한자리에 모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다.

2018년에는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리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악수를 청하며 담소를 나눴고, 미국 측 당국자가 리 외무상에게 내용물이 알려지지 않은 서류 봉투를 건네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다자회의가 자연스러운 북-미 간 만남의 장이 됐던 것. 하지만 올해는 이렇게 직접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화상으로 ARF에 참석한 안광일 주인도네시아 북한대사는 10분 동안 원론적인 공개 발언만 했다.

한 외교부 당국자는 “다자회의에서는 모든 나라가 이른바 ‘떡보다 콩고물’에 더 관심이 많다. 다자회의 그 자체보다 다른 참석국과 인사를 나누거나 개별 회담 기회를 마련하는 게 더 중요한데 화상회의에선 그럴 가능성이 제로”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코로나19 상황을 외교적으로 이용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미국이 21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리는 유엔총회를 ‘100% 비대면’으로 진행하자고 주장한 것. 표면적으로는 코로나19 확산 위험을 이유로 들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코로나19 백신 독식 등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코너에 몰릴 사안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하지만 결국 회원국들의 요청으로 대면, 비대면을 섞는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유엔총회에 대면으로 참석한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일정은 잡지 못했다. 대면 참석을 해도 코로나19 이전의 유엔총회처럼 활발한 정상 외교가 이뤄지기 어려워진 것이다.

○ “인터넷 연결 끊기면 최악 의전 실수”

청와대에는 의전비서, 외교부에는 의전국이 따로 있을 만큼 외교의 꽃은 의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회담 때는 매분 매초 정해진 각본에 따라 움직인다. 양국 정상이 등장하는 시간, 동선, 발언하는 순서, 공동서명 때 사용하는 볼펜까지 미리 준비해 둔다. 실수가 큰 외교 결례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2019년 문 대통령이 금주 국가인 브루나이에서 국왕에게 건배 제의를 해 결례 논란이 일었고 2018년 싱가포르 아세안 정상회의에서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회담 시간이 엇갈려 문 대통령이 회담장에 10분 이상 덩그러니 대기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벨기에에서 열린 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서 이동 동선 착오로 문 대통령이 정상 단체사진 촬영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대형 의전 사고였다. 한-스페인 전략대화 때 구겨진 태극기를 건 외교부 담당 과장은 보직 해임되기도 했다.

주요 회의들이 화상으로 대체되면서 이 같은 의전 실수에서는 자유로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네트워크 연결 상태’라는 새로운 의전 변수가 생겼다. 한 외교부 관계자는 “가장 최악의 의전 실수는 인터넷 연결이 끊기는 것”이라면서 “다자회의에서는 국가 발언 순서가 중요한데 연결이나 소리가 끊기면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

실제로 3월 바이든 대통령이 연 기후정상 화상회의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녹화 발언이 기술 결함으로 중단됐다. 다음 차례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 넘어갔지만 푸틴 대통령은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두리번거리다가 뒤늦게 발언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외교부 화상회의 기술 지원을 맡고 있는 정지훈 VEC 대표는 “코로나19 초기 화상회의에서는 나라마다 인터넷 환경이 다 달라서 갑자기 화면에서 사라지거나 음향이 들리지 않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면서 “사기업 화상회의보다 실무진 리허설을 배로 꼼꼼히 한다”고 했다.

○ “화상회의로는 상대 화났는지 몰라”

화상회의가 일반화됐지만 여전히 대면이 아니면 논의가 어려운 사안들이 있다. 북핵 협상이 대표적이다.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카운터파트인 성 김 미국 대북특별대표와 올해만 6번 공개 대면회의를 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보안이 필요한 북핵 협상 특성상 화상회의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 “긴밀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위해서는 직접 만나야 한다”고 했다.

특히 다자, 양자 관계에서 ‘외교술’을 발휘하려면 대면회의가 필요하다고 외교관들은 말한다. 한 외교관은 “화상회의로는 그 나라의 비언어적 표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면서 “어떤 이야기를 꺼냈을 때 불쾌한 반응을 보였는지 등 상대국을 직접 만났을 때만 쌓을 수 있는 외교적 자산이 있다”고 했다.

다자회의에서는 화상으론 우방국 간 ‘협공’이 어렵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달 ARF에서 “한미 연합훈련은 건설적이지 못하다”면서 중단을 요구했지만 한국과 미국은 이를 반박하지 못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대면으로 이뤄졌더라면 왕 부장 발언 뒤 한미 실무진이 긴급히 만나 메시지를 조율했을 것”이라면서 “현장이 없으니 돌발 상황에서 발 빠른 대처가 어렵다”고 했다.

○ ‘하이브리드 외교’ 시도

韓-메콩 외교장관 화상회의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프라크 소콘 캄보디아 부총리 겸 외교장관이 8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한-메콩 외교장관회의를 공동 주재하고 있다. 정 장관과 소콘 부총리는 한국에서, 다른 참가국 장관들은 각자 나라에서 화상으로 모인 ‘하이브리드형’ 외교회의다. 외교부 제공
불필요한 출장과 의전 준비가 사라진 건 비대면 외교의 장점이다. 하지만 대면회의가 불가피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외교부는 둘을 섞은 ‘하이브리드 외교’를 시도하고 있다.

8일 서울에서 열린 제11차 한-메콩 외교장관회의는 외교부가 최초로 시도한 하이브리드 회의다. 한국과 올해 메콩국 의장국인 캄보디아가 서울에서 함께 회의를 주재했다. 라오스 미얀마 태국 베트남 외교장관은 화상을 통해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해에는 모두 화상으로 진행됐다. 정의혜 아세안국 심의관은 “참가국이 전부 대면으로 만났다면 100명이 넘는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야 했을 것”이라면서 “방역 부담은 최소화하되 한-메콩국 간 긴밀한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의장국을 초청해 접촉면을 넓혔다”고 말했다. 방한한 프라크 소콘 캄보디아 부총리 겸 외교장관은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별도로 대면 회담을 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코로나19가 종식되더라도 실무진은 화상으로 협의하고 최종 마무리만 대면회의를 하는 하이브리드 형식이 계속될 것 같다”면서 “현지 공관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당국자는 “대면회의와 의전을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신입 외교관들을 교육하는 것도 과제”라고 말했다.

최지선 정치부 기자 auri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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