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칼럼]메르켈의 리더십을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2021. 9. 1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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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0년대 중반 공부하기 위해 독일에 도착했을 때 헬무트 콜 총리가 이 나라를 이끌고 있었다. 콜은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 출신의 정치가였다. 당시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았던 내게 보수적인 기민당은 독특한 존재였다. 대서양 저편 보수적인 미국 공화당이 자유시장주의를 내건 것과 달리, 독일 기민당은 시장의 한계와 정부의 적절한 개입을 주장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경제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또 정치 국면의 변화에 따라 과감하게 대연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전통 보수와 기민당식 중도 보수의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이 대선 국면에 왜 독일 기민당 이야기를 꺼냈는지 독자들은 눈치챘을 것이다. 올여름 세계 정치에서 큰 관심을 모은 정치가들 중 한 사람은 이 기민당 출신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9월26일 총선이 실시되면 메르켈은 자신의 약속대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지난 16년 동안 독일을 유럽의 맹주로 부상시킨 메르켈의 리더십에 대한 찬사가 독일 안팎에서 쏟아지고 있다. 독일에서 메르켈은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동독 출신 총리이자 과학자가 직업이었던 총리였다. 자랑을 앞세우지 않고 당면 과제를 유연하게 해결하는 ‘무티(엄마) 리더십’은 메르켈의 상징이었다.

서구 정치에서 메르켈 총리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와 자주 비교된다. 대처가 ‘철의 수상’이라면, 메르켈은 ‘통합의 총리’다. 클린턴이 ‘화려함의 정치가’라면, 메르켈은 ‘평범함의 정치가’다. <위기의 시대, 메르켈의 시대>를 출간한 언론인 슈테판 코르넬리우스는 메르켈 리더십의 특징을 침묵, 행동, 통합에서 찾았다. 메르켈은 말보다 실천을 중시했다. 그리고 연합정치를 통해 개혁과 통합의 열린 정치를 추구했다. 진보적인 녹색당과 사민당의 탈원전 및 모병제 어젠다를 수용한 것은 메르켈의 열린 정치를 증거했다.

막스 베버가 강조했듯, 정치가는 말보다 결과로써 자기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 메르켈의 리더십은 위기 국면에서 빛을 더욱 발했다. 금융위기를 극복했고, 난민위기를 해결했고, 코로나19 팬데믹 위기에 적극 대처했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질주하는 21세기 과학기술 변동에 대한 메르켈의 능동적인 대처였다. 금융위기 직후 메르켈은 독일식 제4차 산업혁명인 ‘인더스트리4.0’ 그랜드플랜을 발표하고 추진했다. 오늘날 지구적 경제 전쟁이 기업 간뿐만 아니라 국가 간 진행되고 있음을 지켜볼 때, 메르켈의 리더십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역량을 선보였다.

주목할 것은 메르켈 리더십의 바탕을 이루는 생각이다. 곧 우리말로도 출간될 <수상: 앙겔라 메르켈의 놀라운 오디세이>의 저자인 언론인 카티 마튼은 말한다. “메르켈은 역사의 궤적이 반드시 정의로운 방향으로 휘어져 나아간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인간이 허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행동의 추진력으로 삼는 낙관론자다.” 인간의 허약성에 대한 통찰은 서구 보수주의 철학의 토대를 이루는 사유다.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 인간은 타인을, 공동체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메르켈은 이 보수의 철학을 실천한 정치가다.

어느 나라든 정치를 결정하는 변수는 제도, 문화, 리더십이다. 독일 정치는 내각제로부터 작지 않은 제도적 구속을 받는다. 과반수에 이르지 못하면 연합정치가 불가피하고, 때로는 대연정을 추진할 수 있다. 그 나라의 정치문화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독일에서 나치즘이라는 역사적 비극은 민주주의와 계몽주의를 중시하는 정치문화를 뿌리내리게 했다. 여기에 더해 콘라트 아데나워, 빌리 브란트, 그리고 메르켈의 리더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부흥을 주도했다. 제도와 문화가 성숙돼 있더라도 리더십이 부재한다면, 정치가 경제와 사회를 후퇴시킬 가능성이 열려 있다.

메르켈의 리더십에 일방적으로 찬사를 보내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치에서 리더십이 갖는 중요성이다. 21세기에 들어와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다. 내년 3월이면 새로운 리더십을 선택한다. 리더십에서도 새로운 것은 없다. 앞선 리더십에 자신의 리더십을 결합시켜야 한다. 개혁과 통합을 동시에 모색한, 말보다 행동을 우선한 메르켈의 리더십이 우리 정치에 안기는 함의가 결코 작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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