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농담이 두려운 세상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2021. 9. 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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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 판사가 법정을 나오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동료 판사가 물었다.

“도대체 뭐가 그리 재미있소?”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을 들었지.”

“아. 나에게도 그 농담을 들려주게.”

“그럴 수는 없어. 방금 그 농담을 한 죄로 피고에게 10년 형을 선고했거든.”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아마도 유머 능력은 인간만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높은 수준의 언어 능력과 기억력, 다양한 층위와 입장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는 마음읽기 능력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전두엽 피질의 기능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호미닌에게서 유독 크게 발달한 부위다.

그래서 어떤 정신과 의사는 첫 면담을 시작할 때 농담부터 꺼낸다. 일단 의사-환자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긴장한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분위기만 밝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단적 목적도 있다. 만약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모욕을 당했다면서 화를 낸다면? 유머를 오해하는 환자는 보통 증상도 심하고 예후도 나쁘다. 반대로 먼저 농담을 던지는 환자라면? 대개 경과가 밝다.

그런데 인간은 즐거울 때만 농담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사실 정말 우스운 유머는 대개 블랙 유머다. 권력에 비굴한 처지, 부끄럽고 무능한 일상, 은밀한 성적 욕망, 그리고 두려운 폭력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압도적인 고통과 갈등, 긴장과 두려움을 일거에 해소해 준다. 한 사형수는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 ‘저 교수대는 안전한가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암살범에게 저격당한 로널드 레이건은 수술 직전 주치의에게 ‘당신이 공화당원이기를’이라며 유머를 건넸다. 성 라우렌시오는 화형을 당하자 석쇠 위에서 이렇게 외쳤다. ‘이쪽 면은 이제 웰던. 다른 쪽을 구워라.’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유머가 억압된 무의식을 반영한다고 믿었다. 개인 혹은 사회가 억압하고 금지한 생각을 초자아가 슬쩍 허용할 때, 농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관대한 초자아는 부드럽고 풍부한 유머를, 엄격한 초자아는 어쩐지 날카롭고 따끔한 위트를 만든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억압된 무의식은 도덕적이지도 않고, 다정하지도 않다. 당연한 일이다. 괜히 억압되겠는가? 그래서 너무 가혹한 초자아는 농담 자체를 아예 허용하지 않는다.

진화정신의학자 조지프 폴리메니 등은 35만쪽이 넘는 민족지 분석을 통해서 유머의 몇 가지 적응적 기능을 제안했다. 분노와 성욕의 간접적 표현, 다른 집단이나 구성원과의 차이 해결, 소속감 향상, 손상된 체면 보호하기, 우월감 유지하기 등이다. 도덕과 관습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머는 아주 유익한 형질이다. 폴리메니 박사는 한 이누이트 여인의 사례를 언급했다. 극지의 삶은 고됐다. 그래서 쌍둥이를 낳으면 하나를 희생시키는 관습이 있었다. 그 여성은 몇 년 전 죽인 아기에 대해 ‘여우에게 한 끼 잘 대접했지요’라고 농담했다. 가슴 서늘한 유머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고, 비극을 희극으로 만드는 인간적 역설이다.

유머는 힘든 시기, 고통받는 집단에서 만개한다. 유대인의 유머가 재치 있고, 조선 시대 하층민의 해학이 와닿는 이유다. 지금은 어떨까? 경찰, 군인, 소방관, 외과 의사 등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집단은 전통적으로 독특한 유머 코드를 가지고 있다. 스트레스를 견뎌내는 방법이다. 외부인은 금방 이해하기 어렵다.

곳곳에 CCTV가 설치되고, 전화 통화는 모두 녹음되고, 회의와 e메일은 모조리 기록으로 남는 세상이다. 농담은 이제 맥락과 유리된 채, 대중에게 그대로 노출된다. ‘경찰관이 현장에서 농담이나 하다니 시민 안전이 장난이란 말인가? 의사가 수술실에서 유머나 지껄이다니 환자 생명이 우습단 말인가?’ 농담을 한 죄로 사회적인 중형이 선고된다. 프로이트라면 이런 현실을 크게 우려했을 것이다. 과도한 제삼자 간섭, 도덕적 엄숙주의다. 희극이 사라진 세상엔 비극만 남는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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