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지도자의 나침반과 지도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2021. 9. 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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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내 연구실 책상 위엔 나침반이 놓여 있다. 해군 장교로 첫 지휘관인 고속정 정장을 시작할 때 선배로부터 받은 것이다. 나침반은 오래전부터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잡아주는 데 필요한 기구였다. 기술이 발달해 인공위성을 이용한 GPS(위성항법장치)나 전자해도를 사용한다고 해도 여전히 나침반은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도구이다. 선배는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해군 장교로서 꼭 가져야 할 자질과 함께 굳은 신념을 지니라고 당부했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우연일까. 10년 전 해군을 떠나기 직전 나침반이 고장 났다. 군복을 벗게 된 것이 해군 장교로서 신념이 부족한 탓이란 자책이 나를 괴롭혔다. 버릴까 고민하다 챙긴 것이 지금까지 책상 위에 남아 있게 되었다. 바늘 한 쪽이 주저앉아 바닥에 닿아 있다. 흔들리지 않는 나침반은 고장 난 것이다. 위치를 옮기더라도 북쪽을 가리키기 위해 나침반의 바늘은 늘 흔들린다. 고장 난 나침반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신념의 부족이 아니라 타협을 모르는 고집과 아집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측량할 때 배웠는데 나침반은 당신이 선 곳에서 북쪽을 가리킬 것이오. 하지만 여정 중 만날 늪이나 사막, 협곡 같은 것은 알려주지 않소. 장애물에 신경 쓰지 않고 목적지로 가다가 늪에 빠지고 만다면 북쪽이 어딘지 알아서 뭐 하겠소?” 영화 <링컨> 중에 나오는 대사이다. 남부를 완전히 재건하는 방식으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던 공화당 급진파 의원인 스티븐슨이 “영혼을 정의로 인도하는 우리의 나침반은 남부 북부 할 것 없이 백인들의 마음속에 노예제 악행을 용인하며 굳어져버려 전혀 쓸모없게 됐다”고 하자 링컨이 그를 설득하며 던진 말이다.

흔히 독도법을 터득했다면 나침반과 지도만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지도를 보지 않고 나침반만을 보고 방향을 설정해 간다면 링컨의 말처럼 늪에 빠질 수도 있고 절벽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반면 나침반 없이 지도만을 따라 가다보면 목표를 잃고 혼돈에 빠지기 쉽다. 이론과 실제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나침반과 함께 제대로 그려진 지도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지도를 읽을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목표가 없는 인생은 나침반이 없는 인생과 같고 실천이 없는 인생은 지도가 없는 인생과 같다.

영화는 전쟁 종결 이전 헌법 13조 수정안을 통과시키려는 링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4년째 전쟁이 계속되며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가던 남북전쟁이 남부의 평화 제의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 역시 물거품이 될 것이라 보았다. 링컨은 신념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맹목적인 추구는 경계했다. 오히려 신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때로는 머무르고 돌아가는 선택도 필요하다고 믿었다. 결국 투표 당일 스티븐슨 의원은 급진적인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유연한 지지 발언으로 힘을 보태고 2표 차로 노예제 폐지를 담은 미합중국 수정 헌법 13조가 통과되는 상황을 지켜본다.

지도자에게 신념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 속에서 스티븐슨 의원은 링컨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는 국민에게는 목표를 제시하고 밀어붙이는 것이 지도자의 마땅한 역할이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신념이 고집과 아집이 되고 편협한 시각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늘 흔들리며 주변 자장의 변화를 감지해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예측 불가능한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바로잡고 현실로 만들기 위한 유연함과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자 역시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며 고집과 아집을 경계했다.

그렇다고 링컨이 모든 것에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나침반을 확인했다. 자신의 신념만을 맹목적으로 주장하지 않았고 혹 자신이 잘못 생각했을 가능성이 없는지 늘 경계했다. 끊임없이 흔들리며 북을 찾아가는 나침반 바늘처럼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이해와 설득을 위해 현실 정치를 멀리하지 않았다. 깊은 늪과 절벽은 피해가려 했지만 오히려 진흙이 좀 묻더라도 털고 나올 수 있다면 돌아가지 않고 지나가는 용기와 결단력도 있었다. 신념이라는 나침반과 함께 이상을 현실로 만들 정교한 지도가 있었기에 노예제 폐지를 이룰 수 있었다.

참 오랜 시간 한반도의 평화와 미래를 우리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미·중 대결이라는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반도 미래를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나침반과 정교한 지도를 가진 지도자가 과연 있을까 궁금하다. 대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한반도 평화 부재의 시기에 그런 후보가 내게는 보이질 않는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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