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코비치 '꿈의 트로피' 놓치고 뉴욕을 얻다

양지혜 기자 2021. 9. 1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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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오픈 우승 놓쳐 '캘린더 그랜드슬램'에 실패한 노박 조코비치/ AP 연합뉴스

US오픈 메인 스타디움 입구엔 테니스 전설이자 대회장의 이름이기도 한 빌리진 킹의 명언이 새겨진 동판이 걸려있다. 선수들은 스핑크스처럼 이 앞을 거쳐가야만 한다.

“압박감은 특권이다(Pressure is a privilege).”

남자 단식 결승전이 열린 13일(한국 시각). 세계 1위 노바크 조코비치(34·세르비아)는 유례 없는 특권을 누렸다. 그는 올해 호주오픈·프랑스오픈·윔블던 트로피를 차례로 수집했고, US오픈에서도 여섯 번 이겼다. 27전 27승 무패. 이날 다닐 메드베데프(25·러시아·2위)만 이기면 한 해 4대 메이저 대회를 싹쓸이하는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었다. 1969년 로드 레이버(호주) 이후 해낸 남자가 없었다. 그는 21번째 메이저 우승을 해서 로저 페더러·라파엘 나달(이상 20회)을 제치고 테니스 사상 메이저 최다 우승 선수가 될 수도 있었다.

조코비치가 등장하자 관중 2만3000여 명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쳤다. 그에겐 생경한 환대였다. 2005년부터 올해까지 US오픈에 열여섯 번 나왔는데 지금껏 뉴욕 팬들은 조코비치의 네트 건너편을 사랑했다. 거기엔 대개 페더러나 나달이 있었다. 2010년대 들어 만개한 조코비치는 페더러와 나달의 경쟁에 뒤늦게 끼어든 ‘3인자’ 취급을 받았고, 미국인들은 라켓을 부수거나 괴성을 질러서라도 어떻게든 이기고 마는 동유럽 남자를 미워했다. 그는 지난해 심판을 공으로 맞혔다는 이유로 이 대회 16강 도중 실격당했다.

다닐 메드베데프가 US오픈 남자 단식 우승컵을 들어 보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날만큼은 뉴욕이 베오그라드가 된 것 같은 열기가 낯선 탓일까, 특권이 주어진 라켓이 무거워진 탓일까. 시속 200㎞ 넘는 강서브도 다 받아쳐 리턴 에이스를 만들고, 끈질긴 스트로크 싸움에서 끝내 승리하며, 벼랑 끝까지 밀려나도 기어코 역전하는 강심장 조코비치가 안 보였다. 1세트 첫 게임 시작부터 40-15로 앞서가다가 브레이크 당해 결국 첫 세트를 내줬고, 갈팡질팡 스트로크와 느려진 풋워크로 2·3세트 내내 상대에게 끌려다녔다. 마테오 베레티니(8강)·알렉산더 츠베레프(4강) 등과 싸우느라 메드베데프보다 5시간 35분을 더 뛰고 결승에 온 여파가 역력했다.

메드베데프는 날아다녔다. 그는 올 초 호주 오픈 결승에서 조코비치에게 1시간 53분 만에 졌지만 이번엔 달랐다. 올해 조코비치가 뛴 모든 경기를 비디오로 파고들어 전략을 새로 짜왔다. 키 198㎝ 이점을 살린 타점 높은 강서브로 자신의 서브 게임을 쉽게 지켰고, 대나무 같은 몸매로도 파워 스트로크를 퍼부어 랠리 싸움을 주도해나갔다. 메드베데프는 서브 에이스(16-6), 공격 성공(38-27), 실책(31-38) 등 각종 지표에서 조코비치를 압도했고, 2시간 15분 만에 세트 스코어 3대0(6-4 6-4 6-4)으로 이겼다. 후안 마르틴 델 포트로(2009), 앤디 머리(2012),마린 칠리치(2014), 도미니크 티엠(2020)에 이어 US오픈에서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한 선수가 됐다. 러시아 선수로선 마라트 사핀(2005 호주 오픈) 이후 16년만의 우승이다.

9월 12(현지 시각) 미국 뉴욕 USTA 빌리 진 킹 국립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2021 U.S. 오픈 테니스 남자 단식 결승 경기후 열린 시상식에서 세르비아의 노박 조코비치가 준우승 컵을 들어보이고 있다. 오른쪽은 러시아의 다닐 메드베데프./Danielle Parhizkaran-USA TODAY Sports 연합뉴스

조코비치는 최후까지 몸부림쳤다. “내 인생의 마지막 경기인 것처럼 육체와 영혼과 다른 모든 것을 결승전에 쏟아붓겠다”고 말했던 그는 3세트 초반 0-4로 밀리다 4-5까지 추격했다. 코트를 바꾸려고 벤치로 들어오는 조코비치를 향해 만원 관중이 박수와 함성을 보냈고, 얼음장 같던 세르비아 남자는 갑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감싸고 눈물을 쏟았다. 그는 트로피를 놓쳤지만 미국인들의 사랑을 얻었다. “놀라운 기량을 펼친 메드베데프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오늘 제 경기력은 너무나 실망스러웠고 결국 져서 마음이 쓰라리지만, 여러분의 응원을 받아 기쁨으로 벅차기도 합니다. 뉴욕에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네요.”

메드베데프의 우승 소감도 조코비치를 향했다. “거대한 역사를 향해 질주하던 위대한 선수를 제가 막아섰네요. 대기록 달성을 망쳐 노바크와 팬들께 미안합니다. 지금 노바크가 느낄 감정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네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역사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는 노바크 조코비치입니다. 그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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