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를 '짜깁기'하라..박정희 정권의 '필요'가 낳은 괴작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 (1)]

박정현 건축비평가 2021. 9. 13.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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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종합박물관을 옹호했는가

[경향신문]

경복궁 내 종합박물관(현 민속박물관)은 1960년대 중반 콘크리트로 문화재를 모방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와 당대에 맞는 재료·공법으로 현대 건축을 지어야 한다는 건축가들의 희망을 엮어낸 결과물이다. 위 사진은 1966년 종합박물관 설계변경안, 오른쪽은 민속박물관의 현재 모습. 박정현 제공·우철훈 선임기자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은 콘크리트의 시대였습니다. 정치인과 경제인, 관료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공사판을 벌이느냐에 달려 있었고, 유례없이 많은 도시와 고속도로, 공업단지와 인프라스트럭처가 지어졌습니다. 건축은 이 건설의 폭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힘겹게 만들어가야 했습니다. 건축은 콘크리트와 철근만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재료들을 붙일 아교로 이론과 역사, 미학과 비평이 필요했습니다. 한국의 건축가들은 현장에서 씨름한 것만큼이나 책상 앞에서 글과도 대결했습니다. 서구와 일본과의 격차는 불안을 낳았고, 이 불안은 다시 글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현실의 무게가 이론을 무력하게 만들기 일쑤였고, 매우 드물게 상상력이 현실을 이끌었지만, 콘크리트와 글은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앞으로 10회에 걸쳐 이어질 이 연재는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이를 둘러싼 담론과 함께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건축사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이 드러나길 기대합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지금의 250분의 1에 해당하는 125달러에 불과했으며, 일본 식민지배는 물론이고 조선 왕조까지 집단 기억에서 생생하고, 힘겹게 탄생한 민주공화국이 독재와 혁명, 쿠데타를 겪으며 몸살을 앓고 있던 1966년 한국에서, 국민국가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건축은 어떤 모습이어야 했을까, 또는 어떤 모습일 수 있었을까? 지금은 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종합박물관이 건립되던 시점의 상황이다.

1960년대 중반 한국에는 기념비가 필요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는 민족감정을 한층 부풀어 오르게 했고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은 산업화에 동원될 ‘국민’을 필요로 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정서적·문화적으로 벗어났음을 확인하게 하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 도약할 국가의 위신을 세울 기념비가 절실했다. 박정희 정권이 경복궁 내에 민족문화의 전당인 종합박물관을 건립하기로 한 결정은 필연적이었다. 기념비적 건축물은 권력의 선전 도구에 그치지 않고 특정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시각적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족 정체성은 한 민족의 모든 역사를 아우르는 예술과 공예 등을 연대기 순으로 모은 박물관과 같은 기관 없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국가 위신 세울 기념비로 종합박물관 계획
“문화재 외형 모방하되 내부는 초현대식”
현상설계 지침 강요에 건축가들 ‘보이콧’

관건은 어떤 건축물이어야 하는 것인가였는데, 답하기 대단히 어려운 과제였다. 우선 건물이 놓일 위치부터 만만치 않았다. 당시 경복궁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근정전과 경회루 이외의 전각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대부분 철거되거나 파괴되어 총독부와 그 부속 시설이 남쪽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지어질 종합박물관은 근정전과 총독부와 바로 대결해야 했다. 이들 사이를 완충해줄 건물이 전혀 없었다. 바꾸어 말하면, 신생 국민국가는 왕조와 식민지배의 상징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했다. 또 당시 한국이 농업국가였다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빚어낸 현대적 감수성을 일부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뽐내고 있었지만, 이들의 존재는 대단히 예외적이었다. 3년 전 치러진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자의 번호를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작대기로 그어 표시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에 대항하면서 그 형태가 무엇을 표상하는지 사람들이 대번에 파악할 수 있는 현대식 건물이 그 답이 되어야 했다. 발주처였던 문화재관리국은 전통 건축물을 현대 재료를 이용해 재구성하는 것이 이 문제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현상설계를 위한 지침은 “건물 그 자체가 어떤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한 것으로써 콤포지숀 및 질감이 그대로 나타나게 할 것이며 여러 동의 조화된 문화재 건축을 모방해도 좋음 (…) 단 내부 시설은 한식을 가미한 초현대식 시설로 한다”고 명시했다. 전국 각지에 있는 유명 사찰 등을 그대로 모방하라고 강권한 셈이었다. ‘초현대식’은 콘크리트가 맡아야 할 몫이었다. 현상설계가 진행되기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예상도에는 한옥의 공포를 “콘쿠리”로 한다고 적혀 있었다.

강봉진의 종합박물관 현상설계 당선안, 1966. ① 본관: 팔상전 ②전시관: 각황전 ③전시관: 극락전 ④전시관: 영남루 ⑤관리관: 미륵전 ⑥강당: 진남관 ⑦정문: 다보탑 ⑧청운교 ⑨연못 ⑩신무문 ⑪미술관 ⑫향원정

건축가들의 생각은 정부 관료와 완전히 달랐다. 1960년대 한국에서 누구보다 현대적이길 원했던 그들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그려보이는 것을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현상설계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김중업, 김수근, 나상진 등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어떻게 풀어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파행 때문인지 최대 국가 프로젝트였음에도 제출된 응모작은 10점에, 그중 까다로운(?) 응모요강을 충족한 안은 3점에 불과했다. 이 3점을 두고 심사가 이루어졌고, 국보건설단이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의 회사를 이끌던 건축가 강봉진의 안이 당선된다.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등 전국의 국보와 보물을 짜깁기한 안이었고, 설계 변경을 거쳐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이후 지어진 전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콘크리트 기와가 올라가게 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월남에 가는 백마부대 용사에게 한복을 입고 싸우라는 격”이라는 미술사학자 김원룡의 평가처럼, 종합박물관은 응모요강부터 준공을 거쳐 지금까지 시대착오적이라는 부정적인 평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발주처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이 프로젝트에서 이런 비난에 맞서 해명해야 하는 인물은 설계자보다 심사위원들이다. 설계자는 지침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이 지침을 만들고 당선안을 뽑은 이들은 더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상설계의 심사위원은 모두 5명이었다. 건설부 장관이었던 김윤기가 위원장이었고, 홍익대학교의 정인국, 서울대학교의 김형걸, 한양대학교의 홍붕의, 문화재관리국장 하갑청이 심사위원이었다. 육군준장 출신이었던 하갑청을 제외하면 모두 건축계 인사들이었다. 세부 전공으로 들어가면, 건설부 장관 김윤기는 와세다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인 최초로 조선총독부 철도국 기사로 채용되기도 했던 전문가 관료였고, 김형걸은 건축구조를, 홍봉의는 건축법규를 가르치는 교수였다. 결국 건축의 양식과 상징적 측면에 대한 책임은 정인국의 몫이었다. 실제로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지던 때, 이 프로젝트를 옹호하고 현실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은 정인국이다. 속된 말로 정인국은 이 어려운 과제의 총대를 멨다.

홍익대 본관, 국립중앙관상대, 한국전력 별관, 조흥은행 본점 등 당대 한국에서 가장 현대적인 기능과 외관을 지닌 건물을 설계했고, 1942년 와세다대학 건축학과 졸업 논문으로 ‘이조시대 궁전건축 연구’를 쓴 정인국이었기에 종합박물관을 둘러싸고 벌어진 현대와 전통 사이의 논쟁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콘크리트로 문화재를 모방하겠다는 정부의 확고한 의지와 당대에 맞는 재료와 공법으로 현대 건축을 지어야 한다는 건축가들의 희망을 어떻게든 엮어내야 했다.

이 난제를 풀어낼 묘수를 정인국은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에서 찾았다. 1915년 처음 출간된 이래 미술사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개념>에서 ‘양식의 순환’이라는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이다. 뵐플린은 고전주의라는 같은 우산 아래에 있으면서도 사뭇 다른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건축, 조각, 회화의 특징을 형식적으로 구분하고 정리했다. 뵐플린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차이는 질적으로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며, 대상을 재현해내는 고도의 기술과도 무관한 “근본적으로 다른 재현 방식”임을 주장했다. 그 유명하고도 악명 높은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 ‘평면적인 것에서 깊은 것으로’ ‘폐쇄적인 것에서 개방적인 것으로’ ‘다원성에서 통일성으로’ ‘절대적 명료성에서 상대적 명료성으로’라는 범주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는 질서에서 일탈했으며 기괴한 양식으로 폄하되어온 바로크를 새로운 눈으로 조명하는 시도이기도 했다.

정인국의 양식 발전 도표 ‘건축 양식 발전의 주기성과 이원성’(1963)
박물관 프로젝트 ‘총대 멨던’ 정인국
시대착오적인 복고주의를 옹호·합리화
근대의 주술서 풀려난 ‘선각자’ 평가도
‘콘쿠리 위에 기와’…괴작이자 시대의 증인
현 민속박물관, 2031년 철거 경복궁 복원

정인국은 1963년 발표한 ‘건축양식발전의 주기성과 이원성’이라는 글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국한한 뵐플린의 논의를 문명사 전체로 확대시켰다. 간단히 요약하면 당대의 현대건축이 르네상스라면 곧 새로운 바로크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밀한 형태보다는 장식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보다는 감성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보다는 지방적이고 민족적인 것이,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 양식은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종합박물관은 기능적이고 논리적인 모더니즘에서 지역적이고 감각적인 지역 양식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정인국은 생각했다.

평소 지론으로 종합박물관을 처음부터 옹호했는지, 종합박물관을 자신이 설정한 문명사의 흐름에 끼워 맞추었는지 분명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논란이 뜨거웠던 1960년대 후반, 거의 아무도 이 설명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달해야 할 근대, 이제 드디어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 근대가 이미 저물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한국 건축계와 지성계에 근대 이후는 한참 뒤의 일이었다. 같은해(1966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이 한국에 도착해 포스트모던을 알리는 데는 30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어쩌면 정인국은 한국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근대의 주술에서 풀려난 인물인지도 모른다.

켜켜이 쌓인 오명을 걷어내고 종합박물관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중반 한국 건축계가 지을 수 있었던 기념비가 달리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시대착오적인 복고주의, 건립과정의 퇴행인 동시에, 정인국을 따라 읽자면, “콘크리트를 나무처럼 다룰 수 있는 시공 방법의 묘”를 발휘한 당대의 상황을 거대한 스케일로 재현한 이 건물은 비슷한 시기 지어진 수많은 현대식 건물보다 1966년 한국의 사정을 더 생생하게 증언한다. 시대의 증인이자 괴작인 민속박물관은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2031년 철거될 예정이다. 현대의 가장 큰 위협은 여전히 과거다.

■박정현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공저)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박정현 건축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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