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비틀었더니 현실이 나와버린 이야기" 뮤지컬 하데스타운 [공소남]

양형모 기자 2021. 9. 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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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남' 오르페우스와 '현실녀' 에우리디케의 아픈 사랑
지옥 하데스타운, "어쩐지 우리 사는 세상 같아"
90%는 음악이 다 했네..애틋한 희망의 엔딩도 오래 남아
사진제공|에스앤코
먼저 오래된 이야기 하나. 우린 이 이야기를 ‘신화’라고 불러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화를 알고 있지만, 이는 어쩐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같지만 막상 책을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매우 드물다는 게 함정이다.

이 신화의 주인공은 오르페우스(오르페오)라는 남자와 에우리디케(에우리디체)라는 여자다. 오르페우스는 음악의 여신 뮤즈 칼리오페의 아들답게 어마어마한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는데, 그의 악기는 생김새부터가 신화스러운 하프였다.

여하튼 오르페우스가 하프를 연주하면 동물들까지 모여들어 귀를 기울였다는 수준이니 요즘으로 치면 조성진급 아티스트라 할 수 있겠다.

사진제공|에스앤코

에우리디케는 사실 인간이 아닌 님프(요정)다.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 게임에 등장하는 귀여운 여자 요정을 상상하면 쉬울 것이다. 참고로 이런 장르에서 뾰족한 귀를 가진 여전사 캐릭터로 흔히 등장하는 요정은 엘프다. 혼동하지 말자.

여하튼 이 두 선남선녀는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골인. 그런데 달콤한 신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으니 님프 에우리디케가 급사하고만 것이다. 자신에게 추근대는 양치기를 피해 도망을 치다 그만 뱀에 물려 사망하고 말았다.

인간도 아닌 님프가 뱀에 물려 죽었다니!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 같지만 넘어가주자.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사기를 쳐 선악과를 따 먹게 만들었던 못된 뱀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아내를 잃은 슬픔도 잠시.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강력한 무기(하프)를 들고 저승으로 향한다. 저승의 강 ‘스틱스(록밴드 이름이기도 하다)’의 사공 카론과 무시무시한 수문장 케르베로스를 음악으로 감동시키며 관문을 통과한 오르페우스는 마침내 저승의 왕 하데스와 여왕 페르세포네 앞에 서게 되고, 이들마저 자신의 연주로 감복시켜버린다.

이렇게 해서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게 된 오르페우스. 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지상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조건이 남아 있었다. 이승으로 나가기 전까지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 하지만 출구 다 와서 오르페우스는 그만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해 뒤를 돌아보고 말았으니….

이렇게 하여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또 다시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식음을 전폐하며 비탄에 젖었다는 비극적인 내용의 신화가 바로 ‘오르페우스’ 이야기이다.

사진제공|에스앤코
이 신화는 너무도 유명하여 수많은 음악, 미술, 문학, 영화로 오늘날까지 변주되어 왔다. 클래식 음악팬이라면 전곡 감상은 못 했어도 제목만큼은 잘 알고 있을 두 편의 오페라,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와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가 대표적이다.

LG아트센터에서 9월 7일 개막한 ‘하데스타운’은 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현재(라고는 하나 역시 판타지 시공간이다)의 이야기로 틀어놓은 뮤지컬이다. 영화, 음악, 소설 다 나왔으니 뮤지컬로 만들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여하튼 이 작품, 신작이다. 2016년 미국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첫 선을 보였고 2019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상복도 터져 토니상 8개 부문을 수상하는 등 한 해 동안 수집한 트로피가 20개에 달한다. 이번 공연은 국내 초연(프로듀서 신동원·제작 에스앤코)이다.

신화시대의 이야기를 ‘요즘 이야기’로 바꾼 만큼 캐릭터들의 변신이 흥미롭다. 오르페우스(조형균, 박강현, 시우민)는 땟국물이 꾀죄죄한 옷을 입은 가난한 작곡가. 하지만 실제 직업은 허름한 클럽에서 일하는 웨이터다. 하프 대신 일렉기타를 메고 있다. 가혹한 겨울을 멈추고 봄을 불러올 곡을 열심히 쓰는 중이다.

사진제공|에스앤코
귀여운 님프 에우리디케(김환희, 김수하)는 오르페우스가 살고 있는 마을에 나타난 이방인으로 배를 채울 빵과 몸을 피할 지붕을 원하는 현실주의자. 이상주의자에 몽상가로 보이는 오르페우스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헤르메스(최재림, 강홍석)는 원작 신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신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전령의 신, 사자(使者)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는 가브리엘쯤 되는 캐릭터라 하겠다.

헤르메스는 이 작품의 내레이터이자 해설자를 담당한다. 장면과 장면 사이를 끼워 잇고 윤활유를 바른다. 그렇다고 극 외부에만 머무는 존재는 아니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그랭구와르처럼 적당한 타이밍에 안으로 들어가 극 중 캐릭터로 활약한다.

지옥의 지배자 하데스(지현준, 양준모, 김우형)는 무시무시한 염라대왕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인정머리 없고 고약한 악덕 기업주 같은 느낌. 그가 지배하는 하데스타운(하데스는 그리스어로 지옥이라는 의미이다)은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공장지대처럼 보인다. 지하세계답게 어둡고 음침하며 피지배자들의 삶은 암울하고 기계적이며 반복적이다.

마지막으로 하데스의 아내이자 하데스타운의 여왕인 페르세포네(김선영, 박혜나). 개인적으로 이 캐릭터가 가장 흥미롭고 눈길이 갔다. 여신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케세라세라” 술꾼 귀부인이 남았다.

젊은 시절의 다정함이 사라져버린 남편을 증오하고 있다. 장난기가 많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지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놓고 하데스와 대립할 때는 사뭇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사진제공|에스앤코

요즘 작품치고는, 아니면 요즘 작품답게 무대는 화려한 눈요깃거리를 배제하고 아이디어와 감각으로 구성했다. 심플하지만 신선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뮤지컬의 진짜 힘은 음악에서 나오는 법.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음악은 최고다.

드럼을 제외한 악기들이 모두 무대에 배치됐다. 무대 왼쪽에는 바이올린, 첼로와 금관악기 트롬본. 오른쪽에는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 그리고 기타가 자리했다.

‘킬 넘버’의 멜로디 하나로 전 극을 꿰며 여기저기에서 보이차처럼 우려내는 작품은 아니다. 귀에 쟁쟁 남아 나도 모르게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는 넘버는 없지만 대신 한 곡 한 곡이 너무나 ‘뮤지컬적’이고 ‘음악적’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음악 장르로 재즈를 채택했는데,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재즈를 앞세우지는 않는다(몇몇 넘버의 경우 꼭 그렇지는 않지만).

딱 필요한 순간, 최적한 타이밍에 살짝 재즈의 분위기를 발라놓는데, 이것만으로도 음악이 ‘확’ 살아나니 신기할 뿐이다.

사진제공|에스앤코

넘버들이 하나같이 너무 아름답고 인상적이어서 집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였는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 ‘웨딩송(Wedding Song)’이 그랬다. “결혼반지는 누가 살 건지, 만찬은 누가 준비할 건지, 침대는 누가 꾸며질 것인지”를 묻는 현실주의자 에우리디케에게 오르페우스는 “내가 노래를 부르면 강물이 막혀있던 강둑을 열어 보물을 쏟아내고, 만찬은 숲이 차려주고, 새들이 깃털을 떨어뜨려 우리의 침대를 꾸며줄 것”이라고 노래로 답하는 장면이다. 차갑고 시니컬한 에우리디케가 마음을 열고 오르페우스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 아름다워 눈을 가늘게 만든다.

“손을 위로 형제여, 즐기며 살자”는 페르세포네의 ‘즐기면서 사는 거야(Livin‘ It Up On Top)’도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 응원가처럼 들리는 곡. 반대로 어두운 하데스타운에서 일꾼들이 부르는 ‘합창(Chant)’는 “머리를 숙여야 해. 머리를 잃기 싫다면”라는 가사처럼 암울하면서도 힘이 있다.

이밖에도 하데스와 일꾼들이 부르는 ‘우리가 벽을 세우는 이유(Why We Build The Wall)’, 페르세포네가 2막에서 부르는 신나는 솔로넘버 ‘지하세계의 여왕(Our Lady Of The Underground)’, 오르페우스의 테마곡으로 여겨지는 ‘서사시Ⅲ(EpicⅢ)’, 하데스를 빠져나오는 동안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오르페우스의 ‘의심이 찾아들어와(Doubt Comes In)’ 등 잊기 힘든 넘버들이 수두룩하다.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도 어느 한 명 빈틈이 없다.

조형균(오르페우스)의 환상적인 미성은 그야말로 ‘신화적’이다. 최재림(헤르메스)의 트럼펫처럼 끝도 없이 뻗어져 나가는 황금빛 소리는 또 어떠한가. 김우형(하데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근육질 소리는 과연 지하세계의 지배자를 표현하기에 제격이었다.

최근 자신의 첫 정규음반으로 재즈를 선택한 박혜나(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여신인지 재즈의 여신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완벽하게 이 작품의 음악을 이해하고 소화해냈다.

끝으로 이 작품을 관극한 후 갖게 된 추가적인 느낌과 생각을 딱 세 줄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어쩐지 요즘 세상에 비추어 볼 때 하데스타운이 우리가 사는 지상세계 같다.

2) “이 슬픈 사랑의 노래를 우리는 그래도 계속 부르리(헤르메스)”. 호텔 델루나의 장만월과 구찬성의 이별처럼 애틋한 희망을 갖게 하는 엔딩이 참 근사하다. 글룩은 오페라에서 사랑의 신이 에우리디케를 되살려 내고, 부부가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해피엔딩을 만들었는데, 개인적으로 ‘하데스타운’의 엔딩이 훨씬 더 매력있다.

3) 기타를 배우자.

※ ‘공소남’은 연극, 뮤지컬, 콘서트 등 공연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코너로 ‘공연 소개팅 시켜주는 남자’의 줄임말입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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