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에서 탈출하면 어디에 다다를까? 노동·젠더·인종 첨예한 주제 다룬 서울디어시티비엔날레
[경향신문]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전시명인 ‘하루하루 탈출한다’는 ‘도피주의’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코로나19 이후 생존법 중 하나가 비대면이다. 많은 사람이 좋든 싫든 팬데믹에서 도피, 탈주를 선택해야 했다. 도피해 다다른 곳이 피안이 아니라 봉쇄·단절·고립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토비아스 칠로니의 연작이 비엔날레 주제에 부합한다. 그는 팬데믹 기간 한국, 일본, 독일, 몰타의 도시 풍경과 그곳 청년들의 모습을 담았다. 청년들은 인적 드문 거리에 서 있거나 가게 앞에 쭈그려 앉아 있다. 칠로니는 이 인물·풍경 연작에 ‘추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인간에게서 벗어나 자연으로 향하는 ‘도피’도 이어졌다. 전시작 중 불, 물, 나무, 쇠, 흙 같은 자연의 소리와 전자음을 믹싱한 사운드트랙 작품인 림기옹의 ‘오행(五行)’은 자기 위안과 명상의 도피와 연결해볼 수 있다.

나머지 작품들은? 무기력과 회피보단 ‘도피해야 하는 현실’ 자체를 파고든다. “비엔날레는 급진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의 명제에 부합한다. 계급, 노동, 권력, 인종주의, 젠더, 섹슈얼리티, 이주 같은 첨예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이어진다. 국제전인 비엔날레답게 아시아와 미국, 유럽 곳곳의 이야기를 담았다. 우선 한국 상황은 어떤가.
김민의 ‘Yes We Cam’은 집회·시위 현장에서 시민들을 채증하는 경찰을 ‘다시 채증’한 사진 연작이다. ‘can’(할 수 있다) 대신 ‘camera’(촬영한다)의 ‘cam’을 썼다. 총 400여점의 연작 중 70점이 나왔다. 2012~2016년 촬영한 작품인데, 지금도 전국의 집회·시위 현장에서 채증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채증한다’는 진행형의 문제다.

장영혜중공업의 ‘삼성의 뜻은 재탄생’은 단채널 비디오 7개로 구성한 플래시 애니메이션이다. 1화 ‘임원’엔 ‘정권은 교체해도 삼성은 유지된다’ 같은 자막이 트로트를 편곡한 음악 사이로 흘러간다. 2화 ‘스마트폰’의 자막 하나는 ‘너는 삼성에서 뼈 빠지게 일했으니 필시 삼성의 스마트폰으로 태어나야겠지’이다. “과로사로 죽은 삼성 ‘임원’을 소재로 한국 사회의 노동의 조건, 기업 문화의 고질적 병폐, 언론의 모순과 위선,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모순을 유머로” 꼬집는 작품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모순’은 DIS의 ‘절호의 위기’에서 볼 수 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화이트워커 캐릭터가 월가에서 미국의 자산 불평등, 월스트리트 고액 연봉 문제를 고발한다. 무니라 알 카디리의 비디오 작품 ‘Soap’도 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부유한 아랍인 아버지가 딸에게 “신랑감은 네 오빠한테 맡겨라”라는 말을 건넬 때 입주 노동자 한 명이 카펫을 청소하는 장면이 지나간다. 걸프만 지역 텔레비전 연속극 장면에 노동자 모습을 합성했다. 미디어가 재현하는 부자들의 화려한 일상에서 가려진 노동과 이주의 문제를 환기한다.


아이사 혹슨은 여러 나라의 호텔, 바, 카바레에서 공연하는 필리핀 이주노동 뮤지션에 영향을 받아 ‘필리핀 슈퍼우먼 밴드’를 결성했다. 뮤직비디오를 차용한 ‘슈퍼우먼: 돌봄의 제국’의 주인공이다. 이 밴드 멤버들의 무대 의상은 중간중간 방호복으로 바뀐다. “팬데믹 시대에 의료서비스업계 종사자가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기본적인 처우는 좌절되는 필리핀의 현실”을 다룬다.


이번 비엔날레에선 ‘K팝’을 차용한 작품이 여럿 나왔다. ‘슈퍼우먼: 돌봄의 제국’의 음원은 블랙핑크의 ‘킬 디스 러브’를 매시업한 것이다. 의상과 안무도 한국 아이돌의 그것을 참조했다.
만화경을 뜻하는 ‘KALEIDOSCOPE’는 문화의 수용·변용, 발전의 차원에서 들여다볼 만하다. 이 작품의 아티스트인 C.U.T는 ‘스웨덴 K팝 보이 밴드’다. 스톡홀름 왕립예술학교 학생 6명이 멤버다. 강사 밍 웡이 매니저를 맡았다.
이들은 작사·작곡, 프로듀싱, 퍼포먼스, 홍보·머천다이징 등 K팝의 구성 요소를 관찰한 뒤 뮤직비디오와 인터뷰 영상을 제작했다. ‘KALEIDOSCOPE’는 이들의 데뷔곡이다. “대중문화 산업에서 충분히 재현되지 않는 퀴어 친화적 가치를 강조하며 K팝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려 한다”고 했다.

브리스 델스페제의 ‘바디 더블 34’도 퀴어에 관한 작품이다. 퀴어 영화로도 분류되는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독립영화 <아이다호> 중 ‘게이 잡지 시퀀스’를 차용했다. 아마추어 배우 14명이 트랜스젠더 잡지 표지 모델로 번갈아 등장한다. 잡지 표제는 건강, 문화, 패션, 생활에 걸쳤다. 이들에게도 삶과 문화가 있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헨리케 나우만의 ‘프로토 네이션’은 정치와 권력 문제를 다룬 작품 중 하나다. 혼합 매체 설치 작품인 ‘프로토 네이션’은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일상 디자인에 끼친 영향을 탐색한다. 가상의 구두 브랜드 가게에 가짜 광고 영상이 돌아간다. 작가는 ‘민족 중심주의’ ‘소비자 민족주의’ ‘한류’ ‘밀레니얼’ 같은 단어를 넣었다. 하이힐을 신은 북한 여군을 촬영한 보도 사진에 가상의 구두 사진을 합성했다. 그 뒤에 따라오는 화면 글씨가 ‘고난의 행군’이다. 리처드 벨의 ‘호주인 긁기’는 첫 원주민 대통령을 가상으로 설정한 뒤 백호주의와 백인 특권 문제를 환기한다.

41명(팀)의 작품 58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11월21일까지 열린다. 비엔날레 웹사이트(mediacityseoul.kr)에서 야외 전시·행사 일정과 장영혜중공업, 림기옹, 요한나 빌링의 영상 작품을 볼 수 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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