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자리 옆에 바짝 다가와 앉는 말

한겨레 2021. 9. 13.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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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ㅣ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며칠 전 음식점에서 밥을 먹다가 반가운 시 한 편과 마주했다.

밥을 늘 이렇게 천천히 드시냐고 물었더니 예의 그 천천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임길택의 '고마움'을 외워 들려준다.

"<오리 돌멩이 오리> 동시집에서 '형선이'라는 시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저도 밥을 느리게 먹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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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숨&결] 이안ㅣ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며칠 전 음식점에서 밥을 먹다가 반가운 시 한 편과 마주했다. 모처럼 지인을 만나 같이 밥을 먹는 자리였는데 속도가 여간 느린 게 아니었다. 밥을 늘 이렇게 천천히 드시냐고 물었더니 예의 그 천천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임길택의 ‘고마움’을 외워 들려준다.

“이따금 집 떠나/ 밥 사 먹을 때// 밥상 앞에 두곤/ 주인 다시 쳐다봐요.// 날 위해/ 이처럼 차려 주시나// 고마운 마음에/ 남김없이 먹고서// 빈 그릇들 가득/ 마음 담아 두어요.”(전문)

나도 오래전부터 가까이 두고 사는 말이라 몇 대목을 반기며 아는 체하였다. 이 시를 읽고는 한동안 식당 밥상에 올라온 음식을 다 먹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니까 자기로서는 다 먹는 마음 대신 천천히 먹는 마음이나마 오래 간직하고 살고 싶다면서 형선이 안부를 물었다. 형선이는 내 동시에 나오는 어린이 이름이다. 안 그래도 얼마 전 다녀온 충남 아산시의 거산초등학교에서 받은 5학년 어린이의 쪽지에도 형선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오리 돌멩이 오리> 동시집에서 ‘형선이’라는 시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저도 밥을 느리게 먹거든요.”

형선이를 만난 건 2017년 여름, 충주에서 열린 권태응 어린이 시인학교에서였다. 형선이는 3학년으로 또래에 비해 몸집이 작은 편이었다. 눈썰미가 좋고 손이 야무졌다. 누가 보더라도 재능을 타고난 아이로 보였다. 그림도 시도 남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밥 먹는 속도가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느렸다. 나는 형선이 모둠의 교사라서 형선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곁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 했는데, 그것은 정말이지 적잖은 인내를 요하는 일이었다. 2박3일 동안 다섯 끼를 형선이랑 같이 먹었다. 내가 아무리 늦게 먹어도 형선이가 먹는 속도보다 서너 배는 더 빨랐다. “얼른 먹자”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다.

이 학교에선 어린이만 아니라 교사도 똑같이 시를 쓴다. 참가 어린이들과 모둠 교사인 시인들이 학부모들 앞에서 시화전도 같이 하고 발표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이들이 쓰는 시를 보아주는 틈틈이 모둠 교사도 끙끙거리며 시를 써야 한다. ‘형선이’는 그렇게 해서 쓰게 된 시다.

“형선이가 밥을 아주 천천히 먹어서/ 형선이가 밥 먹는 모습을 아주 오래 지켜보았는데/ 형선이가 밥을 얼마나 천천히 먹느냐면/ 형선이가 밥을 다 먹고 숟가락을 놓는 순간/ 온 세상에 기적이 일어날 것처럼 천천히 먹는다/ 마침내 형선이가 숟가락을 놓고 일어선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도/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형선이’ 전문)

에코백에 만든 시화에는 형선이가 그려 준 그림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형선이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밥 먹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을까. 그래서 중학생이 된 지금은 급식실 식탁에서 숟가락을 놓고 일어서는 시간이 또래들과 비슷해졌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괜스레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소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하루 세 번 식탁에 앉아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를 바치는 가장 나직하고 더딘 기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세상의 방향과 속도에 어지럼증이 일 때마다 늘 자리 옆에 바짝 다가와 앉는 말이 있다. 가령,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장석남, ‘입춘 부근’) 같은 말이거나,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성선, ‘다리’)이라는 말 같은 것. 이런 말 덕분에 나는 오늘도 세상의 속도나 방향에서 한 발 비켜나 조금 다른 쪽을 보며 얼마간 더딘 사람으로 걷고 싶어진다. 그리고 가만히 소망을 품어 본다. 언젠가 이런 말 한 줄 받아 적는 마음을 가진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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