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럽과 팬덤이 말하지 않는 것들

한겨레 2021. 9. 1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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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심리학 강연에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타인을 돕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특히, 이것이 '방송용'이 아니라 실제 일상에서 유사하게 구현된다는 전언들로 인해 그 진정성은 상승하고 겸양과 연민, 유머와 쾌(快)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대체 불가능한 셀럽이 되었다.

다만 이 역시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이상형이나 행복이라는 가상에 대한 집착, 이것이 극적으로 표현된 계기라는 점에서 기꺼이 환영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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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류웅재ㅣ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최근 한 심리학 강연에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타인을 돕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공감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다짐했다. 주제와 관련해 활용한 사례는 방송인 유재석이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해보자.

한 연예인이 투자한 사업에 실패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일면식도 없던 유재석에게 전화를 해 사정을 의논하고 싶다고 했다. 기대 없이 전화를 한 것이었는데 유재석은 사정이나 들어보자며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그리고 섣부른 조언 대신 묵묵한 공감의 언어적, 비언어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한다. 이를테면, 당신의 상황을 전부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고 이를 극복하기를 바란다는 식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는 당대의 대중문화를 쥐락펴락하는 유명인의 일반적인 행동양식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날 대중문화에서 유재석은 하나의 현상이다. 그는 1980년대의 가왕 조용필이나 90년대의 문화대통령 서태지와 같은 문화 권력이면서 개방적이고 체화된 겸손과 공감의 미덕을 보여주기에 이전 시대의 인물들과 구별된다. 특히, 이것이 ‘방송용’이 아니라 실제 일상에서 유사하게 구현된다는 전언들로 인해 그 진정성은 상승하고 겸양과 연민, 유머와 쾌(快)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대체 불가능한 셀럽이 되었다.

이에 대해선 이견이 없고 그의 성공에 어떤 사족을 달 생각 또한 없다. 다만,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문화산업이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미디어 문화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그간 빠른 경제성장과 더불어 케이팝(K-Pop) 등 문화산업의 약진으로 한국의 세계적 위상과 이른바 국격이 상승한 오늘날, 역설적으로 개인이 겪는 삶의 어려움, 만성화한 경쟁과 정서적 허기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또한 경제적 조건과 줄곧 연동하는 것이긴 하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주조되거나 상상된 차이들로 인해 강화되는 혐오와 배제, 이의 부산물 역시 사회적 신뢰나 안정성에 큰 위협이 될 만큼 그 양상이 퇴행적이다. 철학자 한병철의 진단처럼 오늘날 분노와 이를 위한 용기는 사라지고 짜증과 불평이 이들을 대신한 자리에서 단절의 부정성은 사라진다. 이러한 마음의 궤적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거나 외려 심화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산물인 스타와 그가 표상하는 페르소나는 우리에게 웃음과 위로를 줄 수 있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분노나 슬픔 대신 불평과 혐오, 구조적 변화 대신 힐링과 소비, 마음의 위안을 욕망하게 하고 재생산한다. 이러한 꿈의 정치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적 비극과 달리, 우리를 환각으로부터 완전히 정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집요한 존재를 드러내준다. 이는 때로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지만, 일련의 변화와 멀며 오히려 이러한 환각을 통해 기존의 질서와 시스템을 유지시킨다.

어쩌면 셀럽이라 명명되는 특정인에 대한 욕망은 우리 자신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공적 영역, 특히 정치와 정치인이 지난 세기의 누아르나 갱스터 영화를 찢고 튀어나온 악인처럼 사생활이 엉망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이념적 선명함과 강인함을 표방하며 이것이 편재하거나 정상성을 획득할 때 다른 경로의 사회적 욕망 또한 강화된다. 평범한 시민들이 트럼프와 푸틴, 두테르테 같은 이른바 ‘센캐’ 대신 유재석 같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중 스타에게 열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이 역시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이상형이나 행복이라는 가상에 대한 집착, 이것이 극적으로 표현된 계기라는 점에서 기꺼이 환영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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