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진보진영의 좌절, 그 뒤엔 80 넘겨도 은퇴 모르는 진보 대법관들

이철민 선임기자 2021. 9. 1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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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미 연방 대법원이 사실상 대부분의 낙태를 금지한 텍사스주의 낙태 금지법을 저지해달라는 긴급 항소를 5대4로 기각하자, 미 진보진영에선 ‘작년 9월 췌장암으로 숨진 연방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87세)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은퇴만 했었어도’라는 탄식이 나왔다. 긴즈버그가 과거 폐암과 직장암 진단을 처음 받았을 때인 버락 오바마 행정부(민주)에서 대법관을 은퇴했으면 후임 대법관도 ‘진보 성향’의 인물이 임명돼, 미 대법원이 낙태를 허용한 1973년의 ‘로 vs. 웨이드’ 판결에 따라 텍사스 법의 위헌성을 즉각 따졌으리라는 것이었다. 공화당이 주지사와 주의회를 장악한 다른 보수적인 주에서도 텍사스를 따라서 비슷한 입법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공화당 지명 대법관들은 80세쯤 자진 은퇴하지만

9명으로 구성된 미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은 임기 제한이 없는 종신직(終身職)이다. 그러나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대법관들은 대략 80세쯤이면 은퇴한다. 예를 들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 대법관에 취임한 앤서니 케네디(85)는 만82세가 되던 2018년 7월 은퇴했다. 따라서 당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후임에 보수 성향의 브레트 캐버너를 지명했다. 닉슨 때 취임한 워런 버거 대법원장과 루이스 파월 대법관 모두 79세가 됐을 때인 2기 레이건 행정부에서 은퇴했다. 즉, 공화당 행정부에서 대법관을 시작하고 끝을 맺어 후임도 ‘보수’ 성향이었다.

자신이 연방 대법관에 임명된 공화당 행정부때에 은퇴해 후임이 같은 '보수'가 되도록 한 워런 버거 대법원장, 루이스 파월 주니어 대법관,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왼쪽부터)./위키피디아

◇83세 넘도록 현직이었던 최근 대법관 6명은 모두 ‘진보’

민주당 대통령이 지명해 취임한 ‘진보’ 대법관들은 정반대다. 80세를 훌쩍 넘겨도 결코 은퇴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엉뚱하게’ 자신과 사법적 이념이 정반대인 후임에게 자리를 넘긴다. ‘진보의 아이콘’이었던 긴즈버그가 그랬다. 그는 81세 때 오바마 행정부에서 은퇴할 수 있었지만, 여러 이유를 대며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민주당에서)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물러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2020년 대선을 두 달도 안 남긴 시점에서 숨져, 트럼프가 지명한 초(超)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으로 교체됐다.

'진보의 아이콘'이었던 긴즈버그 대법관(좌)이 작년 9월 재직 중 사망하자, 대선에 패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후임에 '초(超)보수' 성향의 배럿 대법관 후보를 앉히는데 성공했다./위키피디아

긴즈버그의 ‘판단 미스’로, 낙태 권리를 주장하는 수백만 미국 여성이 좌절했고, 진보 진영은 기후변화‧투표권 보장‧총기 규제‧종교적 이슈에 대해 힘을 잃었다. 긴즈버그가 ‘제때’ 물러나기만 했어도, 연방 대법관 성향은 보수와 진보의 비율이 5대4가 되고 종종 중도 성향을 보이며 결정권을 행사하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에게 ‘균형’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진보’ 성향의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도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80세에 은퇴할 수 있었지만, 90세까지 버텼다. 그나마 ‘다행히’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같은 성향인 엘레나 케이건으로 교체됐다.

만 83세를 넘겼으나 '법원의 정파적 독립성'을 강조하며 은퇴를 거부하는 '진보' 성향의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위키피디아

지난달 15일로 만83세가 된 또 다른 ‘진보’ 대법관 스티븐 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그가 지금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물러나면, 바이든 대통령은 같은 ‘진보’ 성향의 대법관을 지명할 수 있다. 그러나 브레이어 대법관은 지난 7월 하버드대 로스쿨 강연에서 “판사는 자신이 임명되는데 도움을 준 정당에 대한 충성심을 거부하고, 법치(法治)에만 충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판사를 법복을 입은 정치인으로 본다면, 법원과 법치에 대한 신뢰와 법원의 권능은 줄어들 뿐”이라는 것이었다.

지당한 발언이지만, 현실은 브레이어가 2024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는 하는 상황에서 은퇴하면 미 대법원의 보수 성향은 ‘7대2’가 된다. 진보 진영으로선 ‘회복 불능’이다. 이 탓에, UC 버클리 로스쿨 학장인 어윈 체머린스키는 지난 5월 워싱턴포스트에 아예 대놓고 “브레이어 대법관은 긴즈버그의 실수에서 배워서, 지금 은퇴해야 한다”는 글을 기고했다.

◇'진보’ 성향 대법관들이 은퇴를 미루는 진짜 이유는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대법관들의 은퇴는 사례가 많지 않아, ‘이념적 성향’에 따라 패턴을 발견하기는 힘들다”면서도 “진보적 대법관들은 자신의 사법적 철학(이상)보다도,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고 분석했다. “진보적 대법관들은 대법관들끼리의 동료애, 언론과 사회의 주목, 영향력 행사를 즐긴다”며 “그들에게 은퇴는 따분할 뿐”이라고 했다.

은퇴를 거부하니 다른 ‘이유’를 댄다. 긴즈버그는 “내가 물러나도, 오바마 대통령이 상원에서 ‘진보’ 성향의 대법관 후보 인준 받기가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2009년 8월 긴즈버그보다도 더 진보적인 소냐 소토마이요의 상원 인준을 받는데 성공했다.

현재 민주당 일각에서 연방 대법관 수를 15명까지 확대해(court-packing), 전체 성향을 ‘진보’로 바꾸거나 ‘물타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 연방 대법관의 수는 헌법이 아니라, 관련 법으로 정한다.

반대로 보수적인 대법관은 은퇴시기를 정할 때에, 사적(私的)인 동기보다 현실정치와 이념적 원칙을 더 따진다고 한다. NYT는 “보수 성향 대법관들은 최근 수십 년간 미 법조계에서 일관적으로 일고 있는 보수화 운동의 영향을 받아, 자신을 보다 큰 실체의 ‘일부’로 여긴다”고 분석했다.

한편, 미 대법관의 은퇴 시점을 조사한 시카고대의 인구학자인 로스 M 스톨젠버그는 “1954년 이후 16명의 미 연방 대법관이 일반적인 정년인 65세를 넘겨 18년 이상을 재직했는데, 과반수는 은퇴시점을 자신과 이념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대통령 시절로 맞췄다”며 “연방 판사가 평생직인 것은 정치적 독립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연방 판사로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데 정치가 큰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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