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과 철학을 잇는 영화적 가교

2021. 9. 1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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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

[하승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역사지리와 인지생태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영화를 조명한 책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심광현, 유진화 지음, 희망읽기). 평생에 걸쳐 영화이론과 문화이론을 천착해 온 심광현 교수는 영화가 현실의 모순과 소망-성취의 욕망을 매개한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영화철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적 소망은 '현실원칙'에 따라 초자아의 검열을 피할 수 없지만, 꿈에서는 느슨한 형태로나마 검열을 피해 '쾌락원칙'의 무대를 상연한다. 현실에서 좌절된 무의식적 소망이 꿈을 통해 위장된 방식으로나마 성취되는 것이다. 영화는 꿈과 유사하면서도 이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소망 성취를 실현한다. 어떤 면에서 영화는 우리가 일상에서 꾸는 꿈보다도 더 분명하게 소망 성취를 대리-충족하며, 사회적 무의식의 근간인 집단적 소망 성취를 실현한다. 책은 2000년대 이후 제작된 한국 대중영화 중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이른바 천만 영화를 집중적으로 해부한다. 이는 이 시기 대중이 어떤 소망을 지녔고, 그러한 소망이 대중영화와 어떤 방식으로 접속하였는지, 그럼으로써 대중영화가 한국 사회의 역동적 변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조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저자가 지적하듯, 영화가 언제나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나와 세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을 선순환시키고 나의 소망-성취의 꿈을 북돋우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이와 반대로 선순환적 연결망을 파괴하며 이데올로기적 환영/체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후자의 방향은 탈-진실과 포퓰리즘의 시대인 동시대의 미디어 환경에서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배경에서 저자는 불안과 공포를 극대화하는 일련의 영화들에서(<괴물>, <마더>, <기생충>, <추격자>, <황해>, <곡성>과 연상호 감독의 좀비 3부작) 조심스럽게 후자의 경향을 일별해낸다. 반대로 <명량>, <택시운전사>, <변호인> 등을 통해 우리가 마주한 불안과 공포를 협력과 연대로 넘어서고자 하는 선순환의 회로를 읽어낸다. 따라서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는 영화가 안겨다주는 힘을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으로 다시 나누고, 부정적인 힘으로부터 긍정적인 힘으로 방향전환을 시도하는데, 이는 관객성을 정치/윤리의 '문제틀'로 재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고 있는데, 1부는 이론적 틀을 밀도있게 서술하고, 2부는 이러한 틀을 열쇳말 삼아 2000년대 이후 제작된 한국의 천만영화와 SF 영화를 함께 다루고 있다. 3부는 책의 공동저자인 유진화가 작성한 것으로, 1, 2부에서 조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의 천만 영화 10편을 선택해 분석한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부의 1장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뇌과학 연구의 성과를 결합하고, 이를 바탕으로 영화가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고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또한 폴 리쾨르를 원용하여 영화가 사회적 현실 및 관객과 맺는 역동적 선순환의 동적 관계를 ‘삼중 미메시스의 순환’으로 개념화한다. 삼중 미메시스는 미메시스 1, 미메시스 2, 미메시스 3으로 구성된다. 미메시스 1은 인물이 사회적 현실 속에서 벌이는 다양한 행위 가운데 모방할만하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다. 미메시스 2는 미메시스 1을 바탕으로 변형해 낸 인공적인 영화 텍스트를 지시한다. 미메시스 3은 미메시스 2에 대한 수용자의 해석을 중심으로 영화와 관객이 함께하는 수용과정을 뜻한다. 저자는 우선 루이 알튀세르를 따라 "미메시스 1을 감싸고 있는 이데올로기 속에 '내적 거리를 만들어'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이데올로기들을 '보고, 지각하고, 느끼게' 하면서 다른 삶을 상상하도록 유도하는 미메시스 2를 생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동시에 저자는 미메시스 2(영화)가 다중지능적 역량을 활성화시켜 관객으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적 현실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현실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정치/윤리적 효과에 관해서도 역점을 둔다.

1부 2장에서는 우리의 뇌가 만들어내는 이야기하기와 영화적 이야기하기를 서로 비교하고, 이를 관객-뇌와 영화-뇌의 접속이라는 측면에서 규명한다. 저자가 2장에서 다루는 주요 저작은 질 들뢰즈의 <영화 1:운동-이미지>와 <영화 2:시간-이미지>다. 저자는 들뢰즈의 영화 책이 운동과 시간의 관계를 통해 이미지를 재분류함으로써 영화이론의 장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들뢰즈와는 전혀 다른 경로를 추구한다.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를 추상하거나 운동-이미지가 탈맥락화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들뢰즈와 달리, 심광현 교수는 (아마도 브레히트와 알튀세르를 따라), 스피노자에 의거해 시간-이미지를 속성 차원의 창조적인 측면과 양태 차원의 무의식적 측면으로 구분하면서 후자를 운동-이미지와 재연결함으로써 매우 독창적인 영화론을 제시한다. 많은 이론가들이 들뢰즈의 영화론에서 시간-이미지에 방점을 찍는데 반해, 저자는 시간-이미지와 운동-이미지의 복합적 긴장 관계를 부각함으로써 영화연구를 역사적 지평과 연결짓고자 시도한다. 저자가 책에서 강조한 역사지리와 인지생태학이라는 방법은 이 부분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2부의 3장은 1부에서 제시된 이론적 틀에 기대어 지난 20여 년 동안 제작된 한국의 천만 영화를 분석한다. 영화 메커니즘에 대한 세심한 분석에 덧붙여, 장르적 관습, 몰락기와 이행기의 예술이라는 '문제틀'을 통해 천만 영화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이 시기 천만 영화가 현실의 구성에 일정한 역할을 함으로써 진보적 문화정치의 효과를 산출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2부의 4장은 SF 영화를 주의 깊게 천착하는데(<인터스텔라>, <매트릭스>), 오늘날 SF 영화가 인공지능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새로운 환경의 변화를 시뮬레이션해주는 역할, 즉 미래의 변화를 선취매개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해낸다.

3부는 이 책의 공동저자인 유진화가 담당했는데, 1부 및 2부에서 전개된 문제틀을 바탕으로 한국의 천만 영화를 관람한 후에 느낀 소회와 경험을 밀도있게 풀어나간다. 그러나 이를 단지 영화를 관람한 후에 느낀 감상을 소소하게 풀어놓은 것으로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영화로 본 대중의 철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3부에서 작성한 10편의 리뷰에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통찰들을 모아 일련의 철학적 테제를 제출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오늘날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전문화된 학제적 지식의 강화가 아니라, 단편적으로 흩어진 지식을 모아 그것들을 연결해줄 수 있는 성좌적 형식의 발명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벤야민이 언급했던 철학적 에세이 형식으로서 '트락타트'가 구체화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트락타트는 "수많은 판유리를 내던져 가장 좋은 유리 파편을 찾아내 그 불규칙한 조각들을 끼워맞춰 전체 형상을 만들어내는 모자이크처럼, <사실 내용>에 깊이 침잠되어 있는 <진리 내용>의 파편들을 찾아내 그 불규칙한 사유 파편들을 끼워 맞춰 이념들의 성좌를 구성해내는 철학적 방법"이다.

3부는 또한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에서 언급했던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어포던스(affodance), 미메시스 사이의 선순환 회로를 강조하는 관점에 기대어, 10편의 천만 영화를 재분류한다. 오토포이에시스는 자신의 역량을 생산하는 것이다. 어포던스는 제임스 제롬 깁슨이 만든 신조어로, 외부 환경이 안겨다주는 행동 유도 기회를 말하는데, 이는 다시 물, 공기, 대지 등 생명체가 생존하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환경 자원 등의 긍정적 어포던스와 환경오염 등의 부정적 어포던스로 나뉘어진다. 미메시스는 외부 환경의 변화와 몸의 변화의 상호작용을 조율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시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하여> 테제 3에서 말한 바로서의 환경의 변화와 자기 변화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유진화는 <왕의남자>, <베테랑>, <신과함께>, <극한직업>을 오토포이에시스에, <해운대>, <암살>,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어포던스에, 마지막으로 <변호인>, <택시운전사>, <명량>을 미메시스의 영역에 위치시킨다. 이는 각각 자유, 평등, 연대라는 가치에 상응한다.

지금까지 영화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면, 이제부터는 대중과 철학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철학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저자는 우리의 뇌가 나름의 방식으로 외부 세계에 관한 지도를 그리면서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구성하는 과정을 그람시를 따라 대중의 '세계관'과 '인생관'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대중의 '자생적 철학'으로 개념화한다.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전문 철학자들이 만든 철학, 이른바 대문자 철학이다. 그러나 대문자 철학은 수많은 분과학문으로 쪼개어지고 제도화됨에 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전망하는 힘을 상실하게 됐다. 이에 저자는 한편으로 대문자 철학의 적극적인 변형과 새로운 실천을 요청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자생적 철학에 관해서도 일정한 변형을 가한다. 대중의 자생적 철학이 여전히 상식과 미신 등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어 그 자체로 진정한 철학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대중의 자생적 철학이 일련의 변형 과정을 거쳐 진정한 철학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독창적인 철학적 사건'으로 명명하듯, 저자는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 최근 몇 년까지 지속된 한국의 천만 영화 현상이 바로 그람시가 말한 독창적인 철학적 사건에 해당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것이 바로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아닐까?

대중 개념 역시 이 책이 제시하는 가장 근본적인 개념 중 하나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대중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진정한 철학'을 강조하는 그람시의 관점을 개인과 대중의 대립을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라는 연결고리로 설명한 벤야민의 성찰과 접속시킨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연대 속에 개인과 대중 사이의 죽은 대립, 비변증법적 대립은 혁파된다."(벤야민) 곧 저자는 개인과 대중 사이에 '영화적 가교'라는 연결고리를 설정하고, 이를 대중의 철학으로 개념화하는데, 이는 그람시, 벤야민의 통찰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저자는 벤야민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의미하는 바를 천착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3가지 유형으로 세분한다.

첫째, 기존의 계급질서를 강화 또는 지속하기 위해 지배 계급이 피지계급을 상대로 벌이는 지배 계급의 투쟁이 있다. 둘째, 피지배 계급이 지배계급을 상대로 벌이는 투쟁이 있다. 셋째, 단지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위계적 질서 자체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세 번째 유형의 투쟁이다. 책은 '정체성의 정치'로 말미암아 세 번째 유형의 투쟁이 두 번째 유형의 투쟁으로 퇴행하기도 하지만, 모든 계급적 분할을 해체하기 위해 세 번째 유형의 투쟁을 굳건하게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대중 개념 역시 '다중-정체성', '다중-지능', '다중-프랙탈' 구조의 3가지 양태로 구별한다. 대중은 남성, 여성, 세대 간 차이 등 한 가지 정체성으로만 환원되지 않으며 '다중-정체성'을 갖는다. 대중의 지능 역시 언어나 수리 등 특정한 영역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다중-지능'을 실현하기 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다중-프랙탈' 구조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중 형성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중-프랙탈'은 자기 유사성의 반복을 통해 끊임없이 차이가 생성되는 존재 방식을 뜻하는데, 저자는 다중-프랙탈 구조에 기반해 형성된 대중이 '생산수단의 사회화+통치양식의 민주화'라는 더 큰 성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벤야민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이처럼 계급 투쟁의 3가지 상이한 유형과 대중의 3가지 양태를 종합함으로써 이해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이야기를 꺼내며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927년. 에이젠슈테인은 마르크스의 <자본>을 영화화하려고 결심하고 늦어도 1929년까지는 영화를 완성하고자 했으나 끝내 실현하지는 못했다. 비록 에이젠슈테인은 <자본>을 제작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자본>을 영화화할 때 염두에 둔 원칙 가운데 하나를 풀어낸 바 있다. 그는 <<자본>에 대한 노트>에서 단지 사건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변증법적인 방법론" "새로운 테마들", "전술"을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고 언급하면서 이를 '트락타트'와 연결시킨 바 있다.

전술했듯 트락타트는 벤야민이 제시했던 철학적 방법인데, "연습", "입문서", "예비교육"이라는 뜻과도 연결된다. 벤야민과 에이젠슈테인이 말한 '트락타트'의 방법은 이 책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 특히 저자는 '트락타트' 개념을 알기 쉬운 용어로 풀이했고, 3부에서는 '트락타트'의 방법을 재전유하여 이를 동시대 시각 문화를 사고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로 변형시켰다. 트락타트를 원용한 것에서 살펴볼 수 있듯, 저자는 현상들의 개념적 분할을 통해 단자적 이미지들을 추출하고, 다시 이러한 단자적 이미지들을 그러모아 이념적 성좌를 구성하는 벤야민의 독창적인 인식론을 끌어들인다. (2장 3절 참조) 여기서 벤야민이 제시하는 이념은 현상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하며, 구체적 시공간의 좌표에 실존하는 현상 세계의 ‘사실내용’ 속에 깊이 침윤해 있는 진리내용을 뜻한다.

책은 비유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벤야민의 <인식비판서론>을 체계적인 형태로 알기 쉽게 재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벤야민의 인식론을 영화제작과 비평에 이용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로 재개념화한다. 대다수 영화연구가 특정 영화를 분석하기 위한 도구로 철학적 개념을 끌어들인다면, 책은 '형식지와 암묵지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영화철학의 형식지들을 꼼꼼하게 정리했고, 이를 통해 대중영화와 한국 현대사가 어떤 상호작용을 펄쳤으며, 천만영화를 관람한 대중의 선택이 어떤 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추동했는지 세세하게 살핀다. 이 책의 중요성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다.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심광현, 유진화 지음) ⓒ희망읽기

[하승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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