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무대처럼 위태로운 삶..연극 '만선' [리뷰]

선명수 기자 2021. 9. 1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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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만선>이 9월3일부터 19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국립극단 제공


경사진 무대 위에 낡은 양철지붕 집 한 채가 위태롭게 서 있다. 극의 배경은 남해의 한 어촌마을. 지난 3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국립극단의 연극 <만선>은 이 무대처럼 위태롭고도 처절한 뱃사람들의 만선(滿船)의 열망에 대한 이야기다.

고깃배의 무사 귀환과 풍어를 기원하는 무당의 방울소리와 함께 막이 오르면 1960년대 작은 어촌마을이 눈 앞에 펼쳐진다. 바람만 불어도 부서질 것 같은 뒤틀린 낡은 집 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는 그물과 어구들이 이곳의 빈궁함을 보여준다. 그런 곳의 어민들에게도 만선이란 희망이 생긴다. 몇십 년 만에 칠산 바다에 “허벅다리만한 부서(보구치)떼”가 몰려온 것이다. 낡은 양철집의 주인이자 ‘천상 뱃놈’인 ‘곰치’는 배를 띄우고, 꿈에 그리던 만선으로 기세등등하게 돌아온다. 그러나 기뻐할 새도 없이 잡아들인 부서는 모두 선주에게 진 빚으로 넘어간다. 그도 모자라 선주는 남은 빚을 갚지 않으면 배를 내어줄 수 없다고 곰치를 압박한다. 거기에 또 다른 선주 ‘범쇠’는 곰치의 딸 ‘슬슬이’를 자신의 후처로 내어주면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한다.

아들 셋을 차례로 바다에서 잃은 곰치의 아내 ‘구포댁’은 끝도 보이지 않는 가난과 불안에 이제 그만 뱃일을 그만두고 뭍으로 나가자고 남편을 설득하지만, 곰치는 요지부동이다. 그는 “만선이 아니면 노를 잡지 말라”는 가르침을 대대로 받고 자란 뱃사람이다. 그는 “손에서 그물을 놓는 날은 차라리 배를 가르는 날”이라며, 바다에서 죽는 것이 곧 “뱃놈 팔자”라고 믿는다. 수탈이 심해질수록 곰치의 만선에 대한 집착도 강해지고, 결국 폭풍우 속에서도 배를 띄운 그의 집념은 파국을 향해 나아간다.

연극 <만선>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만선>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극작가 천승세가 쓴 <만선>은 1964년 국립극장 희곡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같은 해 7월 초연됐다. 1960년대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서민들의 토속적인 세계를 생동감 있고 적나라하게 그려내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계보를 잇는 작품으로 꼽힌다. 당초 국립극단 7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4월 공연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연기됐고, 올해 심재찬의 연출로 무대에 올랐다.

어민들에게 풍요의 상징인 만선은 역설적으로 극한 빈곤과 수탈의 현실을 드러낸다.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무대는 이런 현실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이렇듯 50여년 시차를 뛰어넘어 2021년의 관객과 만난 <만선>은 착취와 빈부 문제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담아내며 현재성을 획득한다. 곰치의 집착에 가까운 만선에 대한 의지는 현재적 시점에선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다시 파도와 대결하는 인간의 강인하면서도 비극적인 의지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만선을 알리는 징소리와 꽹과리 소리, 어부들의 함성,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110분간 극을 꽉 채운다. 극의 후반부 무대 효과가 압도적이다. 제31회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이태섭 무대 디자이너는 바다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무대 위에 실감나게 구현했다. 배우 김명수와 정경순이 곰치와 구포댁의 강인하면서도 처절한 삶을 연기한다. 김재건, 정상철 등 과거 국립극단 단원으로 활동했던 원로배우들과 이상홍, 김명기, 송석근, 김예림 등 국립극단 현 시즌 단원들이 세대를 초월한 연기 합을 보여준다. 공연은 19일까지.

연극 <만선>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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