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통닭집 간판 글씨도 하나의 역사"
"글자가 모여 이루어진 도시는 시대상 변화 보여주는 박물관"
지하철 1호선 서울역 3번 출구로 들어온 사람들이 ‘차타는곳’ 표지판을 보며 승강장까지 거리를 가늠할 때 서체 디자이너 한동훈(30)은 한글 표기 습관의 변천사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자리에 얼마 전까지도 있었던 ‘차타는곳’은 1974년 1호선 개통 당시 설치된 것이었다. 지난주 만난 한동훈에 따르면 이 표지판의 ㅌ은 가운데 가로획이 살짝 위로 치우쳐 있어서 위쪽 공간이 아래쪽보다 좁은데, 이는 ㄷ 위에 가로획 하나를 더해 ㅌ을 만들던 예전 손글씨 습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글자에는 이런 미세한 이야기들이 얽혀 있다. 그 이야기들을 모아 한동훈은 최근 ‘글자 속의 우주’(호밀밭)를 펴냈다. 글자를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따라 그려보기도 했던 디자이너의 직업병적 기록이다.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에게 글자로 가득한 도시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글자가 등장하고 오래된 글자는 사라진다. 한동훈은 “글자 하나하나가 디자인과 언어의 역사를 보여 주는 문화유산인데 자꾸 사라져서 아쉽다”고 했다. 서울역의 표지판은 현재 깔끔한 ‘서울남산체’로 교체된 상태다. 비슷한 시기의 표지판이 서울 도심권 1호선 역사(驛舍)에 꽤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많은 사람에게 글자는 의미로 해독될 뿐 형태로 인식되지 않는다. 일단 그 조형에 눈뜨면 세상은 거대한 타이포그래피(글자체나 글자 배치 등을 구성·표현하는 시각디자인의 분야)가 된다. 예컨대 아파트. 한동훈은 책에서 은마아파트를 비롯한 강남 유명 아파트 외벽에 ‘銀馬 Eunma Town 16’처럼 한자와 영문, 숫자가 뒤섞여 있음에 주목한다. “이런 변종이 탄생한 이유는 한자를 쓰던 고리타분한 땅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당대의 ‘힙스러움’까지 좇았기 때문이다.”
국민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한동훈은 대학 시절 사당역 헌책방에서 한글 활자 연구가 고(故) 김진평의 ‘한글의 글자 표현’을 접하면서 서체에 관심을 갖게 됐다. “크게 확대한 명조체와 고딕체 활자가 수십 페이지씩 계속되는데 그 선(線)이 묘하게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자의 매력에 빠졌다. 그는 “한글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한동훈은 통닭집 간판, 카메라 셔터 다이얼, 음악만큼 새로웠던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앨범 커버, 1987년 민주화 이후 대선 포스터까지 촘촘하게 넘나들었다. 의식하지 못할 뿐 빛처럼 공기처럼 어디에나 글자가 있다. 글자는 세상을 보는 렌즈인 동시에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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