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용의 직관]두 혁명과 반혁명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2021. 9. 1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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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두 혁명의 깃발이 보인다. 자본의 논리로 자본주의 심장에 빗금 긋는 혁명이다. 자본주의가 양육·증식한 주체들이 자본주의 정점을 향해 진군한다. 자본을 따라 가니 자본의 감시도 없다.

한 혁명은 (여)성혁명이다. 일부를 제외하고 기록된 역사는 남성의 세계였다. 자본주의 이전의 여성은 가정경제 틀에 묶여 있었다. 여성은 소비하고 소비될 뿐이었다. 반면 자본주의는 여성을 생산의 주체로 양성한다. 생산 주체가 된 여성은 이제 남성의 통제를 거부하는 (여)성혁명을 수행 중이다. 혁명 초기라 두 성 간의 감정적 심연이 깊어지고 있지만 곧 메울 날이 올 것이다.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다른 혁명은 경제적 자유혁명이다. 자유혁명은 낡은, 그래서 회귀적 만회혁명처럼 들린다. 고전적 (신)자유주의에서 경제적 자유는 부르주아가 생산하고 유통시킨 이념이다. 그러니 무슨 혁명이냐고 의아해할 것이다. 이들에겐 개인만이 자유의 담지자고, 시장만이 자유의 무대다. 국가, 곧 큰 정부는 자유의 적이 된다.

고전적 (신)자유주의 계승자인 프리드먼에게 경제적 자유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자유다. 국가의 간섭 없는 완전한 소유권의 보장과 행사, 그리고 규제 없는 경제활동의 극대화가 자유다. ‘국가로부터의 자유’와 ‘시장을 통한 자유’를 교묘하게 결합한다. 이런 소극적 자유에 만족하는 사람에게 혁명의 깃발은 낯설다. 진군하는 깃발에는 적극적 자유라는 개념이 쓰여 있다. 적극적인 경제적 자유란 자신이 원한 삶을 구성하기 위해 재화와 자본을 충분히 갖는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라거나, 무절제한 소비 욕구라고 치부하는 사람은 자유혁명이 어떤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는지 못 보고 있다.

자본의 논리로 양육된 주체들이
자본주의 심장에 빗금 긋는
여성혁명과 경제적 자유혁명
그에 반해 남성 불안을 이용하고
경제적 자유를 축소시키려는
반혁명의 해괴한 정치도 있다

(신)자유주의를 대표했던 하이에크에 따르면 지금 소수 엘리트가 누리는 사치는 10년이 지나면 대다수의 일상적 소비가 된다. 물론 경제적 성장이 계속되어야 한다. 100년 동안 인류는 놀라운 성장을 계속했다. 그 덕에 소수 엘리트의 사치가 대다수의 일상적 소비가 되는 시간은 10년이 아니라 5년, 3년, 1년으로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지금 경제적 자유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 격차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혁명은 사치의 동시성을 향해 달려간다. 가능할까?

경제적 성장이 계속된다면 가능하다. 계속 성장은 가능한가? 알 수 없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 대다수가 이 불확실성만을 확신한다. ‘알 수 없다’는 사실, 곧 무지에 대한 인정은 이들의 율법이다. 무지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불안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처방은 놀랍게도 다시 자유다. 자유는 무지의 베일에서 견딜 수 있는 알약이 된다. 실제로 하이에크에게 자유는 어떤 규범적 가치도 없다. 자유는 불확실성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능이고 도구다. 그에게 자유는 행동으로 불안을 극복하는 기업가의 실험정신이다. 기업가 정신 없이도 무지의 베일을 견딜 수 있다면 자유는 폐기처분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는 가치가 아니라 기능일 뿐이다.

반면 경제적 자유혁명의 전사들은 너무나 자본주의적으로 훈육된 나머지 무지의 베일 자체를 가볍게 무시한다. 자본주의가 훈육한 전사들은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한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신봉한 (신)자유주의와 달리 ‘국가를 활용한 자유’를 선호한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국가를 원한다.

혁명에는 반혁명이 뒤따른다. (여)성혁명은 남성과 여성이 새로운 관계에 진입하는 것이다. ‘성적인 협상의 세계, 친밀성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전면에 부상하는 관계들의 세계’(앤서니 기든스)다.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만남과 사랑을 나누는 세계다.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지향하는 의식과 행동은 반혁명이다. 반혁명 세력은 두 성의 갈등과 증오를 자양분으로 성장한다. 무엇보다 남성의 불안과 동요에 감정이입하는 정치가 여기에 해당한다.

경제적 자유혁명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바라는 삶을 개방적으로 구성하고 조율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반혁명은 경제적 자유를 ‘불간섭’으로 축소하며 소극적 자유의 틀 안에 대다수 사람들을 감금하려든다. 반혁명 세력은 최상위 소득자만 적극적인 경제적 자유가 가능하다고 속삭인다. 기본소득만으로도 아름다운 삶을 구성할 수 있는 나라가 경제적 자유의 토대라는 것을 모른다.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구호로 국가권력을 차지하려는 해괴한 정치가 반혁명이다.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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