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누가 더 '아베'다운가

김청중 2021. 9. 12.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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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등 자민당 총재 선거 후보들
보수 아베 노선 승계 경쟁 점입가경
한·일관계 개선 주장 이시바는 배제
차기 총리 대한 韓 경각심 더욱 고조

일본 정치권에 변이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변이라는 정치적 바이러스다. 차기 일본 총리를 결정하는 자민당 총재 선거 후보들의 아베 전 총리 노선 승계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평소 자유분방한 주장 탓에 보수우익 세력의 의구심을 받는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담당상은 출마 선언 과정에서 아베 전 총리를 만나 “정책은 말씀하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는 보도(지지통신)가 나왔다.
김청중 도쿄 특파원
고노 담당상은 이 때문인지 10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평소 지론을 봉인했다. 원전과 관련해 “205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재생에너지 도입을 최우선으로 하고 안전이 확인된 원전을 재가동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했다. 원전 신설 필요성은 부인했지만 탈원전 입장에서는 분명 후퇴했다. 앞서 9일에는 일왕 승계 자격의 여계(女系) 확대를 보류한다는 정부 전문가회의 중간 논의 결과에 대해 전혀 이론이 없다고도 밝혔다. 여계 일왕도 검토해야 한다는 기존 주장을 사실상 철회했다.

아베 전 총리를 중핵으로 하는 보수우익 세력은 3가지 당면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자위대 근거 조항을 신설하는 개헌, 왕위 승계 등을 규정한 법률인 왕실전범(典範) 개정 논의에서 남계·남성 일왕 제도의 사수,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사고 후 중단된 원전 신증설과 개축을 위한 정부 정책 공식화다. 이들은 자민당 총재 선거와 중의원(하원) 총선 후 출범하는 차기 내각과 의회에서 3대 목표가 최대 쟁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보수우익의 명령에 따라 총대를 멜 총리감 선별장이 된 셈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외무상은 주변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비둘기파로 꼽히는 파벌 굉지회(宏志會) 소속이다. 그도 극우성향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보수우익 세력에 추파를 던졌다. 개헌에 대해서는 “긴급사태 조항의 신설이나 자위대 명기를 포함한 4개 항목에 대해 (총리) 재임 중에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여계 천황은 “황실에 대한 일본인의 견해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할 때 여계 천황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원전에 관해선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기준 아래에서 원전 재가동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아베 전 총리 노선을 답습했다.

무라야마 담화(일제의 아시아 침략 사과)·고노 담화(일본군위안부 문제의 강제성 인정)를 부정하고 아베 전 총리가 지지하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총무상은 말할 것도 없다. 아베 전 총리 출신의 최대 파벌인 청화(淸和)정책연구회 모임에서는 “신조·사상에 동의한다”며 다카이치 전 총무상 지지 발언이 이어졌다고 한다. 차기 총리 경쟁 구도는 아베 대 반아베 노선의 다툼이 아니라, 아베 대 아베 노선의 대결이라거나, 누가 더 아베답나 경쟁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역설적으로 다행이다. 일본 총리 교체로 한·일 관계 개선의 실마리가 마련될 수 있다는 허황한 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 정말 무서운 후보는 따로 있었다. 파벌 역학관계에 따라 불출마로 기운 반아베 기수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이다. 그는 헌법에 자위대보다 더 나아간 국방군 조항을 신설하자는 열렬한 개헌론자이면서도 혐한(嫌韓)이 만연한 일본 정치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몇 안 되는 냉철한 정치인이다.

무서운 점이 그의 주장은 한·일관계 개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 일본의 군사안보적 방파제라는, 철저한 국익 계산에 따른 것이다. 한·일의 군사안보적 관계 강화는 경쟁은 하되 충돌은 회피하려는 미·중의 대국정치 속에서 중국을 필요 이상 자극할 수 있어 우리에겐 부담 요인이다.

결국 한국을 경시하는 아베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우익 세력의 이시바 전 간사장 배제는 두 가지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 보수우익과 차기 총리에 대한 한국의 경각심은 더욱 높아졌고, 독이 든 성배와 같은 이시바 전 간사장식 한·일관계 개선론의 영향에서도 비켜날 수 있게 됐다.

김청중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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