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문마저 녹여버린 아름다운 노래의 향연
한국에서 세계 첫 라이선스 공연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神 하데스
욕심에 눈이 먼 자본가로 재해석
사랑과 관계를 잃어버리는 과정
음악과 스토리의 절묘한 조화로
신화, 현대에서 완벽히 되살아나
신인이면서 극작은 물론 작곡, 작사까지 홀로 해낸 싱어송라이터 아나이스 미첼은 하늘의 제우스, 바다의 포세이돈과 함께 지하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하데스와 그의 부인 페르세포네 이야기에 아내를 찾아 지옥에 간 음유시인 오르페우스의 전설을 엮었다. 하데스·페르세포네, 오르페우스·에우리디케의 인연을 이끌어가는 안내자는 헤르메스다. 나머지 등장인물은 운명의 세 여신과 코러스인 지하세계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들이다.
어느 흥겨운 라이브 공연 재즈바를 연상시키는 무대는 헤르메스 노래로 시작된다. 마치 재즈 공연 사회자처럼 ‘차카차카 차카차카’를 반복하며 ‘소울’이 충만한 음색으로 모든 등장인물을 소개한다. ‘미스터 하데스’는 기차를 타고 끝까지 가면 나타나는 암흑 같은 곳, 광산의 주인이다.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기차를 타고 6개월마다 지상과 지하를 오가며 계절의 순환을 만든다. 오르페우스는 노래하는 가난한 남자, 그러나 신들의 은총을 받은 뮤즈의 아들이다. 그리고 에우리디케는 지옥 가는 철길 위에서 배고파 먹을 걸 찾는 한 소녀다.
이후 블루스와 재즈, 그리고 포크송으로 진행되는 극은 신화와 전설을 자유롭게 변주한다. 재즈바, 광산, 철도 등이 등장하는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자연과 산업, 믿음과 의심, 사랑과 공포를 노래한다. 하데스는 현대사회 자본가 모습 그대로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사랑했던 과거를 잊은 재벌 부부로 묘사되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난한 예술가 커플이다.
이 화제작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주제는 조화를 통한 순환이다. 못 가진 자를 차단하는 ‘벽’을 쌓아 올리며 권력과 부를 축적한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에 집착하고, 그 결과 계절의 리듬이 깨진 지상은 피폐해진다. 헤르메스가 보기에 ‘순진해 빠진’ 오르페우스는 ‘뒤틀린 세상을 다시 치유할 노래, 너무 아름다워 모든 걸 돌려줄 노래’를 만들어 세상을 구하려 한다. 작곡에만 매달린 오르페우스를 기다리다 지친 에우리디케는 뱀에 물려 죽는 전설과 달리 스스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데스가 준 티켓을 타고 지옥으로 향한다. 뒤늦게 에우리디케의 소중함을 깨달은 오르페우스는 헤르메스가 가르쳐 준 철길을 따라 지옥으로 내려가고 하데스는 그가 세운 ‘벽’으로 막아서는 데서 1막이 끝난다.
어느덧 재즈바에서 오래된 드럼통 내부 같은 지하세계로 바뀐 무대에서 펼쳐지는 2막의 가장 인상적 대목은 하데스 앞에서 오르페우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강철 같은 하데스, 그리고 그의 지하세계가 연약한 노래의 힘만으로 균열이 생긴다. 페르세포네를 사랑했던 시절, 그의 영혼에 가득 찼던 기쁨과 젊음을 기억해낸 하데스는 다시 부인과 화해하고 세상은 계절의 리듬을 되찾게 된다. 전설대로 지상까지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연인을 데려갈 수 있게 된 오르페우스는 결국 인간의 굴레인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르페우스가 머릿속에서 울부짖는 개처럼 미치게 하는 의심과 싸우며 지상을 향해 걸어 올라가는 장면은 그 결말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된다.
전설과 다름없는 ‘새드 엔딩’이지만 ‘하데스 타운’은 마치 윤회의 고리를 만드는 것 같은 마지막 장면으로 보는 이를 위로한다. 변하는 것 없는 세상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부르리라, 중요한 것은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내 친구에게 배운 교훈이죠.(헤르메스)”
헤르메스 역에는 최재림과 강홍석, 하데스 역에는 지현준·양준모·김우형, 페르세포네 역에는 김선영·박혜나, 오르페우스 역에는 조형균·박강현·시우민, 에우리디케 역에는 김환희·김수하가 출연한다. 모두 여러 무대에서 검증된 믿고 볼 수 있는 배우들이다. 주·조연을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등장인물이 뚜렷한 개성을 갖고 특유의 춤·노래를 보여준다. 극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하나 시종 존재감이 뚜렷한 하데스로서 지현준이 들려주는 굵은 저음은 강력한 만큼 매력적이다. 노래 잘하는 배우 박강현은 이번 무대에선 말하듯 노래하고, 노래하듯 말하는 보기 드문 연기와 노래를 객석에 선사한다. 진성과 가성을 오가며 하이 테너 음역을 소화해야 하는 오르페우스 역을 완벽히 소화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 ‘서사시’, ‘합창’, ‘기다려줘’, ‘우리가 벽을 세우는 이유’, ‘의심이 찾아들어와’ 등 빼어난 노래가 계속 이어진다. 성스루 뮤지컬로서 배우 등·퇴장이 거의 없는 무대, 주요한 장면에 쓰이는 강렬한 비트 등은 연출 레이첼 챠브킨의 전작으로 올 상반기 국내 초연된 ‘그레이트 코멧’을 떠올리게 한다. 오리지널 무대도 브로드웨이에서 이달 초 다시 시작됐다. 헤르메스 역으로 토니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올해 75세 안드레 드 쉴즈의 노래는 대체 불가한 매력을 지녔는데 다시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는 모습은 미국에서도 화제가 됐다. 서울 LG아트센터에서 내년 2월 27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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