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칼럼] 슬픔이 하는 일

한겨레 2021. 9. 12. 21:2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홍은전 칼럼]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고 새끼를 다 빼앗긴 채 하루 세 번 젖을 착유당하는 동안 몸속의 칼슘이 다 빠져버린 소는 3~4년 만에 주저앉아 도살장으로 보내졌다. 피골이 상접해 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난 소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므으으' 하고 울었다.

홍은전ㅣ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며칠 전 <케이비에스(KBS) 환경스페셜> ‘우린 왜 행복하면 안 되지?’ 편을 보았다. 마음에 오래 남아 나를 괴롭혔던 것은 ‘주저앉은 소’였다.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트럭 안에 얼룩소 한 마리가 쓰러진 채 묶여 있었다. 겁에 질린 것인지 완전히 체념한 것인지 허공을 향해 부릅뜬 커다란 눈동자가 자꾸 생각나서 조금 울었다. 울었다고 했지만 슬퍼서 운 것이 아니라 슬프지 않아서 운 것이다. 그의 슬픔을 감히 알 것 같아서가 아니라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눈물 흘린 것이다. 나는 기록활동가이다. 슬픔과 고통을 듣고 그것이 해내는 놀라운 일들을 쓴다. 하지만 비인간 동물들이 겪는 고통을 보았을 때의 감정은 도무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10월에 출간될 책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엔 그런 슬픔을 회복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2019년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은영은 처음 도살장에 갔다. 트럭에 실려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돼지들은 모두 상처로 가득했고 상처투성이의 몸엔 도축될 것임을 표시하는 래커로 휘갈긴 낙인이 선명했다. 엉덩이에 야구공만 한 종양이 부풀어 있는 이들도 많았다. 이 순간을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왔던 은영이었다. 너무 참혹해서 혼비백산하게 될까? 슬퍼서 울게 될까? 절망하게 될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크게 슬프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았고 다만 그 무감각이 충격적이었다. 은영은 이렇게 썼다. “나의 인간중심성이 고발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계속 도살장에 갔다. 슬픔이 아니라 무감각을 계속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트럭 안에서 소 한 마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고 새끼를 다 빼앗긴 채 하루 세 번 젖을 착유당하는 동안 몸속의 칼슘이 다 빠져버린 소는 3~4년 만에 주저앉아 도살장으로 보내졌다. 피골이 상접해 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난 소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므으으’ 하고 울었다. 그때 은영을 한참 바라보던 소가 갑자기 힘을 주며 일어서려다 주저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넘어지길 반복하던 소는 온 힘을 다해 은영 쪽으로 다가와 은영이 힘껏 뻗은 손에 제 이마를 갖다 대고 비비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회오리털이 난 소의 이마는 곧 전기총이 겨눠질 자리임을 은영은 잘 알고 있었다. 트럭이 출발하자 덩그러니 남은 은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손바닥에 남은 감촉을 견딜 수 없어 손바닥으로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렇게 다 죽이고 살아서 우리는 어떡하면 좋으냐고 오열하는 여자를 도살장의 노동자들이 웃으며 구경했다.

은영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동물들이 자기 자신 같았다. 자신도 가정 안에서 폭력적인 상황에 처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은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그들이 끌려간 자리에 번번이 남아 있는 자신이었다. 그 자리는 지난날 은영이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그는 가장이고 너는 딸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던 사람들의 자리였다. 피 흘리며 끌려가는 이를 보면서도 안전한 거리에서 지켜만 보는 사람들, 은영은 자신이 가장 저주했던 모습 그대로 끌려가는 동물들 앞에 서 있었다. ‘새끼를 빼앗긴 엄마 소라면 어떻게든 저 트럭을 쫓아갔을 텐데.’ 은영은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신의 자리가 치욕스러워서 운 것이다. 그의 동료인 섬나리는 그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은영은 마치 자신이 죽은 것처럼, 아니 자신이 죽인 것처럼 통곡했다고. 그리고 폭발하는 동료의 슬픔과 눈물이 냉소와 체념으로 무장해 있던 자신을 송두리째 찢어놓았고 그 취약해진 틈으로 무감각하게 마주했던 수만의 ‘천한’ 얼굴들이 침투해 들어와 자신이 완전히 재구성되었다고.

이것은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한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한 세계의 슬픔에 눈뜬다는 것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이다. 수천의 목숨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죽임당하는 도살장에서 어김없이 살아 돌아와 피 묻은 신발을 신고 말끔한 도시로 들어설 때마다 가슴속에 알 수 없는 슬픔이 차올랐던 사람들은 어쩌면 매번 다시 태어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100일이 흘렀을 때 도시로 들어선 그들의 품에는 작은 아기 돼지가 안겨 있었다. 그들은 ‘구조’라고 했고 세상은 ‘절도’라고 했다. 죽이는 것이 합법이고 살리는 것이 불법인 사회에서 희망은 폴리스라인 너머에 있었다. 축산업이라는 거대한 폭력과 학살 위에 도살되는 돼지는 한 해 2천만 명(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그의 이름은 새벽이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