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혁신] 포스트 코로나와 새로운 시공간

한겨레 2021. 9. 1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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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

[뉴노멀-혁신] 김진화ㅣ연쇄창업가

아이폰을 쓰다 보면 숨겨진 디테일에 놀랄 때가 많다. 예컨대 기상 알람이 울리면 스누즈 버튼이 크게 뜨는데 끄기 버튼은 작게 숨겨 놓았다. 잠결에 알람을 껐다가 낭패 보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일 테다. 타이머는 정확히 반대다. 알람이 울리면 끄기 버튼이 크게, 재설정 버튼이 하단에 아주 작게 뜬다. 설정해 놓은 대로 알람이 울리는 건 똑같은데, 멀쩡한 정신에 쓰는 기능이냐, 비몽사몽간에 접하게 되는 화면이냐에 따라 배치와 디자인이 판이하다. 무심결에 알람을 껐다가 중요한 회의며 시험에 늦게 되는, 악몽 같은 상황에 처할까 불안에 떠는 현대인이라면 감탄할 만한 디테일이다.

찰리 채플린의 우화 <모던 타임스>가 근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것은, 다소 과장되지만 예리하게 그려냈던 근대적 시공간이 여전히 건재한 탓일 게다. 도입부 화면을 가득 채운 시계, 양떼에 오버래핑되는 출근길 행렬은 지금 봐도 생경하지 않다.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시간에 쫓겨 스마트폰 알람을 이중 삼중으로 맞춰 놓고 산다. 노동시간을 강제로 줄이네 마네가 뜨거운 감자가 된다.

제국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근대적 시공간 또한 프레더릭 테일러 또는 헨리 포드 같은 특정 인물에 의해 어느 순간 홀연히 완성된 것은 아니다. 자연의 시간, 배꼽시계의 리듬에 맞춰 살았던 사람들을 공장, 작업장 같은 제한된 공간으로 일사불란하게 결집시키는 일은 상당히 힘든 과업이었을 게다. 때로는 공권력의 폭압이, 때로는 포상 등 당근이 동원됐다. 여기에 학교를 빼놓을 수 없다. 지각생 엄단, 규율 강조, 심지어 방학 중에도 시간표를 만들어 지키도록 훈육하며 근대사회는 완성돼 갔다.

근대적 산물인 ‘사회연대에 기반한 복지국가’는 중산층의 몰락, 일자리 없는 성장 등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기술의 발전과 세계화는 먹고사는 구조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많은 이들이 위기의식을 갖고 새로운 성장-분배 방정식의 고안을 강조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개인과 사회에 고착화된 근대적 시공간의 미시적 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거대 담론은 현실 앞에 무기력할 뿐이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켈로그의 6시간 노동 실험에서부터 근래의 최첨단 기술에 기반한 여러 획기적 방안에 이르기까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았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혁신적 변화에 있어 관건은 방법보다는 계기와 맥락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코로나 덕분이다. 전대미문의 팬데믹이 강고해 보이던 근대적 시공간에 균열을 내고 있다. 원격근무는 생각보다 할 만했고, 출퇴근 시간의 낭비가 줄어드는 건 기대 이상의 편익이었다. 미심쩍은 배달음식과 모바일 장보기도 습관의 문제였을 뿐, 적응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함께 식사하고 술자리로 뭉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렇게 자주, 오랜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됐다. 원격회의 시스템, 증강현실, 메타버스 같은 기술들이 코로나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상기한다면 역시나 변화를 추동하는 핵심은 기술보다는 사회적 맥락 아닐까.

코로나가 가져온 근대적 시공간의 균열은 갈림길을 제시하는 듯하다. 로버트 라이시 등의 우려대로 사회 격차는 현격해질 것이다. 반면 개인과 사회에 프로그래밍되어 온 관습과 습속 탓에 좀처럼 계기를 만들지 못했던 새로운 노동과 일자리 나누기 등의 구조 변화가 가능해질 수도 있다. 확인했다시피 구현할 기술은 부족하지 않다. 다만 식당 문 닫을 시간이 밤 9시인지 10시인지 따위에 매달려 있는 한 변화는 요원할 것이다. 우리들 중 책임과 권한을 가진 누군가는 코로나 이후 펼쳐질 근대적 시공간 너머의 일상과 노동, 분배 같은 구조혁신에 대해 이미 깊은 고민을 시작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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