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으로 오해받은 '우리 식물 이름' 명예회복 기대해요"

구둘래 2021. 9. 12.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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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우리 식물 지킴이 조민제·최동기·지용주씨

왼쪽부터 지용주·조민제·최동기씨. 식물 책으로 가득한 서재에서 인고의 세월을 거쳐 탄생한 책을 펼쳐 보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아이고 이거 들키면 안 되는데요.” 들키면 안 되는 게 너무 많다. 책값을 들키면 안 되고 일하는 동료가 알면 안 된다. 가족에게 반절로 책값을 깎아 알려줬고, 옆자리 동료가 자리를 비우면 딴짓을 하기도 했다.

한 페이지 32줄, 1928쪽, 출전 원전 298종, 참고 문헌으로 나열된 책 1007종, 가격 12만8천원. 숫자가 먼저 압도하는 이 책은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심플라이프 펴냄). 가만히 놔뒀으면 더 큰일 날 뻔했다. “원래 2천 페이지가 넘었는데 출판사에서 그렇게 만들면 책이 찢어진다고 해서 많이 뺐어요.”(최동기) 시간이라는 또 다른 숫자도 압도적이다. 원고 작업과 편집과정 3년을 포함해 5년6개월이 걸렸다.

저자의 면면은 더더욱 상식을 벗어난다. 조민제는 변호사, 최동기는 가전·전기전자제품 유통사의 대표, 최성호는 아시아산림협력기구 국제협력 사업 담당 전문관, 심미영은 페이스북 동아리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운영위원, 지용주는 조경업 종사자, 이웅은 식생과 식물상 조사자.

지난달 28일 조민제·최동기·지용주, 세 저자를 경기도 성남 조 변호사의 서재에서 만났다.

광복절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출간
순수 식물 애호가 6명 6년간 ‘매진’

1937년 정태현 등 조선박물연구회 펴낸
국내 첫 우리말 이름 ‘조선식물향명집’
원전 298종·참고문헌 1007종 등 ‘확인’
“향명집 발간 자체가 민족운동이었죠”

1937년 조선박물연구회에서 펴낸 <조선식물향명집>의 속지(왼쪽), 2021년 8월15일 나온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오른쪽) 표지. 심플라이프 제공

얼핏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저자들은 대부분 순수 식물 애호가이지만 재야 식물학계에 제법 알려진 고수들이다. 또 한가지 공통점은 “<조선식물향명집>(이하 향명집)을 따라 식물 이름의 유래를 정리해보지 않겠느냐”는 조 변호사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는 점이다.

조 변호사가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계기는 2015년 광복 70돌 즈음해 일어난 일제 때 식물 이름과 일부 학자들에 대한 친일 논란이었다. 보통 책은 휴일에 발행하지 않는데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는 지난 8월15일 광복절에 맞춰 펴냈다. 애초에 책의 집필 의도가 ‘조선식물향명집’의 명예회복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책의 부제로도 적힌 <조선식물향명집>은 우리 학자가, 우리 땅에 있는 식물을 근대 학문 체계에 맞춰 분류한 뒤, 우리말 이름을 적어 펴낸 최초의 책이다. 1937년 일제강점기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등 식물학자 4명이 근대 생물학의 분류법에 따라 나누고 이름을 조사해서 펴냈다. 177쪽에 1944종의 이름만 설명 없이 나열했다(名集). 일부에서는 제1저자인 정태현 선생이 일제강점기 공무원이었다, 일본 식물학자의 보조를 해가며 학문을 익혔다, 일본명이 먼저 나온다는 점 등등을 들어 ‘일제의 부역’이라며 향명집을 한쪽으로 밀어놓는다.

하지만 저자들은 향명집 발간이 민족운동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향명집>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맞춰서 식물 이름을 정하는 등 조선어학회의 노력과 발을 맞추었다. “동·식물의 각 지방 명칭을 조사해 통일시키고 장차는 지금까지 조선말로 이름이 없는 동식물에는 따로 조선 이름을 제정”한다는 것이 향명집 저자들이 소속된 조선박물연구회의 창립 이유이기도 했다.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는 이 향명집 표제 순서대로 따라가되, 표제별로 <향약집성방> 등의 원전과 하나하나 대조해 한국 역사 속 이름을 망라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부처손’ 항목에 14개의 고전문헌에서 명기된 이름이 나열돼 있다. 그러니 한 줄 한 줄이 인고다.

저자들의 방법론도 향명집에서 따왔다. 이런 방법론으로 저자들은 과감한 주장도 전개한다. 엄나무 이름이 뾰족하게 난 가시를 아이를 엄하게 키우는 데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있다. 저자들은 “엄나무로 아이 때리면 큰일 난다”며 문헌 비교를 통해 새싹을 뜻하는 ‘움’의 옛말이 ‘엄’인데 새싹을 먹는 식물이라는 뜻이 아닐까 추론한다. 저자들은 “이것이 맞는다는 게 아니라 설득력 있게 추정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기록을 보면, “조선박물연구회 식물부 연구자들은 (…) 장소를 옮겨가며 3년 동안 100여 회” 모였다. 6명의 저자는 90년 전 선학들의 모습을 닮았다.

“회사일 아니면 필수적인 거 외에는 한눈을 못 판다.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작업을 못하니까 끌려가게 되더라. 오히려 그게 추진력이 됐다.”(최동기) 도저히 시간을 못 내어 미안한 마음에 저자에서 빠지겠다며 스스로 손들고 나간 사람이 3~4명 된다. “그래서 전력투구해야 하는 사람만 남게 됐다.”(최동기) 직장-집-직장-집의 생활이 이어졌다. “ 10시쯤 퇴근해서 새벽 2시까지 규칙적으로 작업을 했다. 골프가 취미였는데 쳐본 적이 없다.”(조민제) “주말에 다른 일정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지용주) “원래는 길어야 1년 정도면 끝날 줄 알았다.”(조민제) 하지만 “자료가 자료를 물고 와서 끝이 없이 이어졌다.”(최동기)

그렇게 6년이다. 문헌 비교가 핵심 작업이기에 책(원전 자료)이 경쟁력이었다. “참고한 책값만 해도 차 한 대 값이다. 자전류, 물명류, 일제강점기 사전류 등을 구비하려 애썼다.”(조민제) 간송미술관 ‘훈민정음’도 구해서 살폈다. “딱 19종 식물 이름이 나오더라.”(조민제) 최동기는 한 권이 웬만한 직장인 월급인 네 권짜리 책 세트를 회사와 집에 각각 두었다. “책이 무거워서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다.

특히 기업 인수·합병(M&A) 전문 변호사로 과로로 건강을 해쳐 등산을 하다 야생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는 조 변호사는 2018년말 한국과학사학회지에 ‘<조선식물향명집> 사정요지를 통해 본 식물명의 유래’라는 논문을 발표해 학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뜻밖의 원조도 있었다. 책에 들어간 사진은 감수자이자 정태현 선생의 제자인 이우철 박사(강원대 명예교수)가 제공했다. ‘정태현 채집본’ 중 한국에 보존된 것은 6·25전쟁 때 소실됐다. 이 박사는 일본 도쿄대학 근무 시절 채집본을 찾아 일일이 슬라이드 사진을 찍어왔다. 감수를 부탁하고자 찾아갔을 때 이 박사가 슬라이드 사진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글자 만으로 빡빡한 책에 대한 고민이 한꺼번에 해결됐다.

구둘래 <한겨레21>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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