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하늘과 어찌 이리 똑같을까" 9·11 현장서 수십만명 고개 숙였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2021. 9. 1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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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행의 뉴욕 드라이브]
9.11 테러 20주년 기념식 현장
20년 전 9.11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한 여성이 11일 9.11 테러 20주년 기념식에서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 조성된 '메모리얼 풀'을 찾아 희생자 명비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아 꽃을 꽂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 11일(현지시각) 오전 8시46분. 뉴욕시 맨해튼 9.11 추모박물관을 비롯한 뉴욕 전역에서 일제히 조종이 울렸다. 지난 2001년 9월 11일 테러범들이 이끈 아메리칸 에어라인 11편이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에 첫 충돌한 시각이다.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 모인 희생자 유족과 시민 수십만명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일부는 눈물을 훔쳤고, 많은 이들이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한 70대 노부부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20년 전 하늘하고 어쩜 저리 똑같지”라고 속삭였다.

9월 11일(현지 시각) 뉴욕 9·11테러추모박물관에 모인 희생자 가족과 동료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있다./AFP 연합뉴스

9.11 테러 20주년을 맞은 이날 뉴욕은 거대한 ‘제례의 도시’로 바뀌었다. 일주일 전부터 관공서 등 곳곳엔 성조기 조기(弔旗)가 내걸리고, 도로와 거리 곳곳에 시민들이 가져다놓은 추모 화환과 소형 성조기가 놓였다, ‘잊지 말자(Never Forget)’란 이름으로 각종 추모 행사와 공연이 이어졌다.

9.11테러 20주년 기념식장에서 올려다본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그라운드 제로와 9·11 추모박물관 인근엔 이른 아침부터 시민 수십만명이 쏟아져나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유족이 아닌데도 장례식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꽃과 선물, 손수 제작한 ‘명예의 국기’ 등 9·11 기념물이나 당시 신문, 그을린 성조기 등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기념식장 반경 100m 안엔 유족 8500여명과 극소수 언론을 제외한 일반인 접근을 통제했는데, 현장을 멀리서 에워싼 인파 수십만명이 경건한 침묵과 질서 속에 기념식을 지켜봤다. 대부분 뉴요커였지만 플로리다, 캘리포니아 등에서 날아온 이들도 있었다. 군·경찰 특수 병력이 대거 투입돼 삼엄한 경계를 펼쳤지만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9월 11일 콜로라도 에드워즈에서 열린 9·11테러 20주년 추모식장 모인 사람들이 희생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초등학생 자녀 셋을 데리고 그라운드 제로에 나온 40대 올리버씨는 기자에게 “커다란 비극이었고 아직도 원인이 해결됐다곤 할 수 없지만, 역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국가와 공동체를 존중하는 것을 후대에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2001년 태어났다는 20세 대학생 고메즈씨도 친구들과 함께 나와 “뉴욕의 아픈 기억, 그리고 그 이후 모든 이들의 노력으로 이런 일상을 다시 찾게 된 데 대해 이웃들과 기념하고 감사하고 싶었다”고 했다.

뉴욕 소방대원(FDNY)들이 11일 9.11 테러 당시 구조작업에 투입됐다 희생된 소방대원 343명을 추모하며 기리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날 기념식에선 매년 해온 9·11 테러 희생자 2977명의 이름을 모두 호명하는 의식이 총 네 시간에 걸쳐 치러졌다. 8시46분 이후 두 번째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9시3분, 또다른 테러가 워싱턴 DC의 펜타곤을 공격한 9시47분 등 기념비적 시각마다 총 6번 조종과 함께 전국민 묵념이 이뤄졌다. 일몰부턴 그라운드 제로에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상징하는 빛 두 줄기를 하늘로 쏘아올리는 ‘트리뷰트 인 라이트’ 점등식이 열렸다.

뉴욕 맨해튼 9·11추모박물관에 '20년 동안 절대 잊지 않았다'라고 쓴 피켓이 희생자 사진과 걸려있다./로이터 연합뉴스

또 9·11 당시 테러 현장에 투입됐다가 343명의 사망자를 낸 소방대원(FDNY) 추모 기도회와 추모 행진이 맨해튼 5번가 세인트 패트릭 성당에서 열렸다. 소방대원들의 백파이프 연주 속에 시민들이 이들의 희생에 감사하며 큰 박수를 보냈다.

미국이 9.11 테러 20주년을 맞은 가운데 뉴욕 맨해튼에서 11일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상징하는 파란 빛 두 줄기가 하늘로 쏘아올려지는 '트리뷰트 인 라이트'가 열리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은 단일 공격으론 최대 희생자를 낸 9·11 테러에 대한 복수로 시작한 중동 대테러전쟁이 최근 아프간 민주정부 건립 실패와 미군 패퇴 속에 미완의 종전을 선언한 가운데 20주년을 맞았다. 지난 20년간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숨진 미군만 6600명으로 테러 희생자보다 두 배 이상 많다. 9·11 테러 이후 상시화된 미국의 감시 사회와 인종·종교 간 갈등, 국내 테러 빈발의 문제도 지적된다.

결코 완벽한 승리나 치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극히 일부 정치 세력을 제외하고 미 국민들은 국가의 역할, 역사적 기억에 대해 큰 합의를 만들고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왼쪽부터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 조 바이든 대통령 부부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커플, 낸시 펠로시 연방하원의장,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등이 11일 뉴욕에서 열린 9.11 테러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 /AP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이 이날 뉴욕의 9·11 테러 20주년 기념식에 총출동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성명에서 “우리의 최강점은 단결”이라며 “단결은 서로 똑같다는 게 아니라 서로와 나라에 대한 근본적 존중과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취임 후 첫 9·11 테러 기념일을 맞은 바이든은 이날 뉴욕과 펜실베이니아, 워싱턴 DC 등 피해 현장 세 곳을 모두 돌며 추모식을 이끌었지만 따로 연설을 하지는 않았다. 아프간전 철군 관련 논란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알려졌다.

9·11 테러 때 대통령이었던 공화당 소속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펜실베이니아 섕크스빌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미국의 분열상과 국내 폭력을 비판하며 단합을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만 이날 뉴욕 맨해튼의 한 경찰서를 따로 찾아 “바이든의 아프간 철군이 무능했다”고 맹비난했다.

미국 네브라스카주 링컨에서 열린 NCAA 대학미식축구 경기시작전 9·11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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