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세 아버지가 '나는 게이'라고 고백했습니다"..영화 '비기너스' 리뷰 [씨네프레소]

박창영 2021. 9. 1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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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③ 영화 '비기너스' 리뷰

폭력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아이를 때리는 부모가 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다고 한다. 여러 심리학 연구들, 그리고 통계가 이를 보여준다. 사람은 부모를 모델로 삼아 그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너는 어렸을 때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으니 어른이 돼선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해주겠다' 같은 보상은 동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어렸을 때 운이 좋게 사랑 많은 부모를 만난 아이가 성인이 돼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가 쉽다.

75세의 아버지는 어느날 자신이 게이라고 커밍아웃한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그러므로 부모로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훌륭한 롤모델이 돼주는 것이다. 화가 나도 대화로 풀고, 절망적 상황에서도 이성을 찾고, 자신의 욕망을 줄이고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어른을 보고 자란 자녀는 문제 상황에 닥쳤을 때 엄마, 아빠가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리며 해법을 모색한다. 만약 아이가 컸을 때 자신의 애인, 배우자와 서로 진실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부모가 해줄 일은 명확하다. 부모 스스로 본인의 애인과 배우자를 깊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모의 삭막한 결혼생활을 보고 자란 올리버는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게 두렵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비기너스'(2010)는 어린 시절 부모의 냉담한 관계를 보고 자란 중년 남성 올리버(이완 맥그리거)의 이야기다. 그는 잘생겼고, 직장에선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자신을 걱정해주는 친구들을 두고 있지만 연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덴 번번이 실패한다. 애시당초 사랑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 때문에 이젠 누군가와 만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에 실망해온 그의 마음을 한번에 돌릴 만한 여자를 파티에서 만나게 된다.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까.
파티에서 만난 애나는 처음부터 올리버를 강하게 사로잡는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퍼즐처럼 딱 들어맞는 짝을 만났는데, 왜 삐그덕댈까

올리버는 애나(멜라니 로랑)가 자신의 온전한 짝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그녀가 그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그는 음악 CD용 삽화를 발주한 고객에게 '슬픔의 역사' 같은 것을 그려줬다가 퇴짜 맞을 정도로 내면에 깊은 고독을 지닌 인물이다. 친구들은 그 엉뚱한 행동의 원인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이해하진 못한다. 그러나 파티에서 처음 만난 애나는 그를 보자마자 "슬픈데 왜 파티에 왔죠?"라고 물어본다. 어떻게 알아챘느냐는 올리버의 질문에 애나는 노트에 그의 눈을 그려준다.
애나 역시 올리버에게 끌리긴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눈은 닮아 있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그가 그녀에게 강하게 끌리는 또 다른 이유는 애나 역시 자신과 비슷한 슬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적, 성격적 매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내면의 색채가 비슷한 애나에게 올리버는 마음을 뺏긴다. 퍼즐처럼 딱 들어맞는 사람이 있다면 애나일 것 같다. 아울러 배우인 애나는 교양이 있으며, 커리어도 탄탄하다. 두 사람은 완벽한 짝으로서의 조건을 상당 부분 갖춘 셈이다. 하지만 둘이 함께 있는 순간에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슬픈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설레기만 하는 시간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75세에 "나는 게이"라고 커밍아웃한 아버지에게서 답을 찾다

이 영화는 세 개의 시간 축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하나는 올리버와 애나가 연인으로서 관계 맺는 현재, 또 하나는 부모의 서먹한 관계를 봐야 했던 올리버의 어린 시절, 마지막 하나는 어머니와 사별한 아버지가 커밍아웃한 시점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4년간의 시간이다.
어머니와 사별하고 6개월 뒤 커밍아웃한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다시 말해 3개의 시간 축 중 2개는 현시점에서 올리버가 회상하는 과거다. 올리버는 애나와 조금 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고 싶지만 사랑에 실패했던 부모를 떠올리며 매번 걸려 넘어진다. 남편 사랑을 갈구했던 엄마, 끝내 이에 화답하지 않았던 아빠의 관계에는 위기를 맞이한 그가 참고할 만한 해답이 없다.

또 하나의 시간 축에서 부친은 조금 다르게 기억된다. 아내를 떠나보낸 75세의 부친은 올리버에게 "사실 나는 게이"라고 커밍아웃한다. 애인을 구하는 광고를 내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나선다. 그의 파트너는 암으로 투병 중인 아빠를 찾아와 애벌레를 선물해주고, 또 창으로 햇살이 쏟아지던 어느 오후 옆에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잔다. 두 사람에게도 위기가 찾아오지만, 기다림으로 극복한다.

이성애자 아들, 커밍아웃한 아버지에게 사랑을 배우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과거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병렬된 것으로 봐도 무방하지만, 올리버가 기억을 적극적으로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찾은 에피소드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어떻게든 애나와의 사랑만큼은 성공시키고 싶은 올리버가 자신이 과거에 목격했던 두 가지 사랑 속에서 해답을 찾는 것이다. 이른바 '정상 가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부모의 관계 속에선 그가 모델로 삼을 만한 내용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커밍아웃을 한 뒤 진짜 사랑을 찾고, 이를 가꾸기 위해 노력했던 4년의 시간은 여전히 사랑에 '초보자(비기너)'인 그가 모방해도 좋을 만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올리버와 애나, 두 비기너스는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려 한 걸음 뗀다.
75세에 커밍아웃한 아버지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사랑은 전염된다

이 영화는 형태가 다른 사랑을 차별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성애자인 올리버는 이성애자 부부 울타리로 묶여 있었던 자신의 부모에게서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게이 파트너의 동성애 속에선 이성애자인 자신이 참고할 만한 해답을 찾았다.

사랑은 형태가 아닌 크기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성애 커플로 묶여 있든 동성애 짝으로 결속해 있든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진지한지가 중요한 것이란 의미다. 반면 관계 속에 사랑이 없다면 어떤 형태로 결합돼 있든지 공허할 뿐이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 커플 사랑 속에서 감동받아 자신의 사랑을 더 발전시킬 수 있고, 그 반대, 또는 어떤 다양한 형태로도 사랑은 확산돼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는 전염된다는 편견과 혐오에 감독이 '그렇다'고 도전적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성애는 전염될 수 있다고. '동성'애라는 형태로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아껴주고 싶은 사랑의 욕구를 주변에 전염시킬 수 있다고. 물론 그 반대로 이성애자가 동성애자 사랑의 롤모델이 되어 사랑을 전염시킬 수도 있다.

데이트하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햇살이 따사롭게 비친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따뜻한 색채의 드라마

'비기너스'는 휴머니즘에 기반한 따뜻한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고령의 아버지가 "나는 게이"라고 밝혔던 순간을 회상할 때 아들은 아버지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해내려 애쓴다. 그의 관심은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정확히 추억하는 것이지 자신의 성적 지향을 알고서도 엄마와 결혼한 그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올리버가 반려견 아서에게 다정히 말을 거는 모습도, 남편에게 냉대당할지언정 아들에게 그 우울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엄마의 익살스러움도 포근하다. 인생을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우린 어떤 면에서 모두 '비기너스'이니깐 서로의 미숙함을 이해하며 살자고 말을 건네온다.
`비기너스` 포스터.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장르: 드라마, 로맨스
주연: 이완 맥그리거, 크리스토퍼 플러머, 멜라니 로랑
감독: 마이크 밀스
평점: 왓챠피디아(3.8),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85%) ※9월9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왓챠(9/13까지 감상 가능), 네이버·웨이브·카카오페이지(단건 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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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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