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모든 것들과 화해한 그때 즈음엔

한겨레 2021. 9. 11.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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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_ 38. 나조차 알 수 없는 어느 날
그림 박조건형

그런 날을 상상해본 적 없는 건 아니지만, 상상조차 가능할까 무력해지는 그런 시간이 있다. 나는 그곳에 있지만, 동시에 없다. 김영옥 선생님의 말처럼 기록이란 ‘배를 붙이고 감각해야 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때 ‘기록’의 의미조차 기억하고 있을까?

깊은 물속에 잠긴 듯 생각의 수면을 오르내리고, ‘뇌 속 차단기가 하나씩 내려가는’ 그 기이한 재난을 나는 섣불리 가늠하지 못한다. 육신은 늙었지만 아이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섭리는, 내 안에서 한번 더 뒤엉킨다. 김영옥 선생님의 책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속 ‘치매’와 관련된 페이지를 읽으면서, 나는 천진난만하게만 떠올렸던 ‘늙음’의 풍경에 한발 더 바짝 다가간다. 깊고 깊은 사유로 벼려진 번뜩이는 문장들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한번도 꺼내본 적 없지만, ‘두렵다’는 한마디가 또 하나의 혀처럼 입속을 뒹군다. 나는, 두렵다. 성소수자인 나 ‘역시’ 두렵다.

‘치매’라는 것이 온다면

중년이라면 대부분 다르지 않겠지만, ‘치매’는 내 것으로 먼저 오지 않고 내 부모의 것으로 온다. 제주에 사는 복희씨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낯선 얼굴로 나를 마주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런 소설을 쓰려고 구상을 하기도 했었는데, 과거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특성상 복희씨는 자신의 둘째를 아들로만 기억할 테니, 그렇다면 자신 앞에 선 여성의 모습을 한 나를 복희씨는 무엇으로 인식할까? 둘째를 앞에 두고 둘째를 찾는 어미를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곤두박질치고 마는 이야기를 감당하지 못해 나는 거친 몇개의 문장들로만 그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아직 그 두려움조차 제대로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복희씨와 헤어진 채 살아야 했던 지난 시절은 자그마치 수십년, 그렇다면 내 소설은 끝내 복희씨를 제대로 그려낼 수 없을 테니 어쩌면 그 작품은 완성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사실 더 큰 두려움은 내 안에 있다. 그 시간이 바로 나 자신에게 들이닥쳤을 때 말이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의 나를 ‘다시’ 만나게 될까? 더 정확히 말해, 나는 어떤 성별의 내가 되어 있을까?

몇몇 혐오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내 몸속 염색체 안의 성별은 어찌해도 변할 수 없고 그것이 분명히 ‘남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나는 현재의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갑자기 남성인 내가 되고 마는 걸까? 인식과 기억은 동의어일까? 수행된 ‘젠더’는 기억이 사라지면 허물어질까?

물론 나는 생물학적 기호 하나에 불과한 그것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 근거라는 그들의 사유 방식을 납득할 수 없지만, 그들의 주장과는 별개로 당사자로서 내 존재의 공동(空洞)을 알기에 이따금 두려워진다. 혐오자들이 두려운 게 아니라, 불완전한 나를 알기에 두렵다.

내 기억이 가닿지 못하는 과거가 혹시 무언가를 숨기고 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현재를 지우고 과거로만 회귀하는 그 노년의 시간은, 나를 어떻게 변하게 할까? 행복했던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물론 김영옥 선생님은 아주 현명한 해답을 제시한다. 치매 이후의 삶을, 자신을 잃어버린 ‘비(非)사람’의 존재로만 환기하는 이 사회의 인식을 꼬집으며, 선생님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아’ ‘관계 속의 자아’에 방점을 찍는다.

그 시간을 공포와 두려움만으로 환기한 채 벌벌 떨기만 하는 우리의 태도는 현명한가 되묻는다. 또 하나의 삶인 그 시간을 사는 누군가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충분한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은 채, ‘관리’와 ‘격리’의 방식으로만 ‘처리’하려는 이 사회의 태도를 날카로운 문장들로 비판한다. ‘노령 사회’니 ‘실버 세대’니 대단한 관심을 지닌 것처럼 떠들면서, 대놓고 짐 덩어리 취급하며 창고에 쌓듯 치워버리려는 우리의 편협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트랜스젠더인 나는 더 멀리 떠밀리고 만다. 나 자신에 대한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 그런 몸이 되고 말았을 때, 평생에 걸쳐 내가 찾은 나의 성별은 적절하게 존중받을 수 있을까? 내 몸속에 녹아든 ‘남성 염색체’의 다름이 나도 모르게 내 존재를 가로막아, 나는 다시 또 어딘가에 갇혀버리게 되고 마는 건 아닌지. 한 인간에 대한 존중이 한없이 쪼그라들어버린 그 시간 속에, 서로 다른 생을 살아온 우리는 어떻게 존중받으며, 어우러지며 서로의 흰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있을까?

이따금 그런 악몽을 꿀 때가 있다. 두 다리 사이에 안으로 말아 넣어 묶었던 수술 부위가 쏟아져 나와 덜렁거리는 꿈 말이다. 너무도 놀라 핏덩이인 그걸 뜯어내면, 두 다리 사이가 허망하게 닫혀버리고 마는 꿈.

무수한 두려움과 잔혹을 이겨내며 살아남았다고 믿었는데, 늙어가는 몸을 알게 되면서 자주 무기력해진다. 살아남기 위한 내 삶의 전환을 후회하는 건 아닌데, 깊은 고민이나 숙고만으로 가늠되지 않는 노년의 시간 앞에 한 목숨의 인간으로 공허해질 때가 있다.

노년의 시간 앞에서

거친 길을 올랐으니 더 많은 돌이 굴러 내렸을 뿐이라고, 그러니 나는 조금 더 큰 비명을 질러야 했던 거라고, 내가 나를 위로하는 수밖에 없다. 겁먹지 말라고, 그거 별거 아니라고, 그동안 한생을 일으켜온 그 힘을 잊지 말라고, 내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바로 그때, 우리도 그렇다고, 그렇게 버티고 있다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바란다. 서로에게, 그런 모두이기를 바란다. 그럴 수 있는 우리이길.

인생의 어느 때고 제 삶을 말해보겠다고 덤벼들지만, 우리는 어떤 삶도 공평하게 말하지 못한다. 열이나 스물은 치우치고, 서른이나 마흔은 매몰되고, 쉰에서 겨우 삶을 돌아보다가, 늙음 앞에 마음을 놓치고 만다. 어떻게든 내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 하지만, 기록해야 할 늙음은 너무 많고, 그래서 또 너무 쉽게 위축된다. 침묵하고 머뭇거리고, 제자리를 도는 것만 같은 그 마음을, 우리 사회는 너무 간략하게 적는다.

아니다, 그 이름이 아니다. 아니다, 그 이름은 하나의 이름일 뿐 온전한 인간의 기록이 아니다. 내가 나를 위해 적었던 내 삶의 이름은 틀렸고, 그 의미조차 제대로 적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삶이 그곳에서 서로를 의지해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고단하고 피로했던 모든 것들과 ‘화해’한 충만한 나를 위해서. 그때야 비로소 무람없이 서로를 버팀목 삼는 우리를 위해서.

김비 _ 소설가.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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