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나를 만졌어.. 남에게 말하면 엄마는 죽어버리겠다고 했어"

곽아람 기자 2021. 9. 1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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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 성폭력 다룬 책 잇달아 출간
국내 피해 여성 11명이 쓴 수기
30년간 피해자 상담한 獨의사 책도
피해자들 "우리 사회, 이 문제 직시해야"
SBS 뉴스추적 '친족 성폭행'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

장화 외 10인 지음|글항아리|256쪽|1만5000원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하인츠-페터 뢰어 지음|배명자 옮김|나무의 마음|230쪽|1만3800원

1989년 6월, 당시 대학교 3학년이던 여성 ‘희망’이 새벽에 인기척을 느끼고 잠이 깼더니 침대 옆에 남동생이 서 있었다. 한참을 누나를 내려다보더니 티셔츠와 바지를 황급히 벗었다. 그 다음부터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희망은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반복적으로 자신을 짓밟는 남동생의 행위를 바라봤다.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고 남동생은 옷을 주섬주섬 입더니 문을 열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희망이 휘청이며 방 밖으로 나갔을 때, 문 앞엔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머니는 희망의 어깨를 붙들고 “네가 낮에 본 건 절대 아버지에게 말하지 마”라고 말했다. 희망은 그 때 기억해 냈다. 그날 낮, “네가 그렇게 해야 누나가 입을 다물어. 아니면 누나가 아버지에게 이를 거야”라며 동생을 설득하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기말고사를 마친 희망이 낮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안방 문은 조금 열려 있었고 문틈 새로는 남자의 상반신에 깔려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동생이었다.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글항아리

너무나 끔찍해 그런 일이 세상에서 일어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혹은 ‘집안 일’이라 차마 남에게 말할 수 없어서 모두가 입밖에 꺼내는 걸 금기(禁忌)로 여기며 쉬쉬 하는 새 처참하게 곪아터져버린 문제, 친족성폭력을 다룬 책들이 연달아 나왔다. 경찰청이 집계한 국내 친족 성폭력 사건만 지난 4년간 3000여 건, 매년 700건이 넘는다. 신고되지 않은 사건까지 포함하면 실제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희망 등이 쓴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는 친족 성폭력 생존자 11명의 기록을 다룬다. 한 가족의 자녀인데도 돌봄받기커녕 성적 대상으로 취급받은 30~50대 여성들이 피를 토하듯 적어간 글이다. 아빠가 딸에게 잠자리를 요구했고, 오빠가 벗기고 만졌으며, 할아버지가 손녀의 ‘성장 점검’을 한 후 그의 아들이 뒤 이어 딸의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폭력은 지속적으로 반복됐다. 생존자들은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 살면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엄마에게 털어놓으며 구조를 요청했지만, 엄마는 가해자 또한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싸며 오히려 딸을 단속했다. 악몽같은 경험은 생존자 ‘장화’의 말처럼 이렇게 요약된다.

‘아빠가 나를 만졌어. 오빠는 내가 꽃뱀이라 비난했어. 내가 그 일을 성폭력이라 말하니 엄마는 죽어버리겠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잘못했다고 말하게 만들었어….’

자신만 뺀 가족이 침묵으로 똘똘 뭉친 상황에서 2차가해까지 받은 피해자들은 죽음과도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친족 성폭력의 피해를 스스로 인지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다니며 상담을 받기까지 적응장애, 우울장애, 수면장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조울증, 기억상실 등을 겪었다. 죽고 싶었지만, 이들은 끝내 살아 남았다.

희망은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은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을 상담하고 있다. 저자 중 한 명인 ‘푸른 나비’ 등 여러 생존자는 현재 ‘친족 성범죄 공소시효 폐지안’을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리면서 매달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친족성폭력의 경우 대부분 피해자가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피해를 겪게 되어 스스로 힘을 길러 상담하고 신고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현행법상 공소시효가 10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난해 가을 텀블벅 펀딩을 통해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처음 나왔다. 후원금을 낸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게 안타까웠던 저자들이 출판사를 찾아 다시 내게 됐다. 읽기 힘든 이야기라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출간됐다.

저자들이 다시 들추고 싶지 않은 상처를 후벼파면서까지 용기를 내 굳이 책을 내며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직면하길 꺼려하지 않고, 입에 담길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함께 내야만 우리가 살아온 현실과 세월이 부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나무의마음.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는 30년간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을 상담해 온 독일 정신과 전문의가 쓴 책이다. 저자는 어머니가 죽은 후 어머니를 빼닮은 자신과 결혼하려 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얼굴과 손에 검댕을 묻히고 짐승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추녀 행세를 하는 공주 이야기를 담은 그림 형제 동화 ‘털복숭이 공주’에서 피해자들이 ‘내면의 감옥’을 탈출할 수 있는 법을 짚어낸다.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으로부터 몸과 마음이 갈갈이 찢긴 피해자들은 자해, 자기혐오, 중독 등의 여러가지 마음의 병에 시달린다.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고 영원히 희생자로 남으려 하는 ‘희생자 콤플렉스’를 겪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극복 과정을 거쳐 제 모습을 찾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왕자와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되는 동화 속 공주처럼, 현실에도 치유의 길은 있다.

“떠올리기조차 힘들 만큼 감당하기 버거운 일을 겪은 사람이 그 일에서 벗어나려면,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일에 대해 계속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을 짓누르는 것에서 서서히 벗어나야 조금씩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정신 건강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독일어로 ‘알리다(mitteilen)’라는 말은 ‘함께(mit)’라는 단어와 ‘나누다(teilen)’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로, 그 안에는 이미 중요한 관점이 담겨 있다. ‘고통을 알린다’는 말은 다른 사람과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말한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은 너무 오랫동안 좌절했고 늘 희생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삶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는 치유의 시작이다. 거기에서부터 동화 속 왕자가 상징하는, 자기방어를 할 줄 아는 남성성이 발달하고, 결혼식이 상징하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희생자 콤플렉스는 어느새 사라지고 자존감을 새롭게 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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