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
[편집자주][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일본에서는 '북한'을 '키타조센(北朝鮮, 북조선)'이라 한다. 북한이나 키타조센이나 그쪽 '인민'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한국을 '남조선' 또는 미나미조센(南朝鮮)이라 하면 우리 입장에서 기분 나쁜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북한'이라는 용어는 북쪽 사람들이 발하는 '남조선'이라는 용어만큼 장구한 세월의 분단을 상징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일본 쪽은 조금 이상하다. 일본에서는 남쪽을 '다이칸민코쿠(大韓民国)'라며 정식명칭을 사용하면서도 유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키타조센(北朝鮮)으로 부른다. 그래서 재일조선인 중 이를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꽤 많다. '조선'아니면 '공화국' 그리고 자신들끼리는 '우리나라'다.
왜 아직도 일본에서는 북을 키타조센이라고 부르는 걸까? 일본에서는 한반도를 조선반도라 한다. 그래서 그 윗부분을 지칭하는 의미로 북(키타)조선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일본 또한 북을 '국가',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타국을 제대로 된 '국가체제'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어디서 연유했을까? 패전(우리로서는 해방) 76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들의 '혼내(本音, 본심)' 속에 남아있는 조선인 멸시 사상이 원인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어떤 존재의 이름을 본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를 때, 의도했건 아니건 발화자의 본심은 그 다른 이름에 반영된다. 20세기 초반 우리는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통해 그 쓰디쓴 아픔을 맛봤다. 황국신민이라며 '내선일체(内鮮一体)'를 주장한 일제는 내지인(内地人)과 조선인(센진, 鮮人)을 확실히 구분했고 같은 일본국적이라도 내지호적을 절대 부여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같은 황국신민이라 하면서도 조선사람들을 '센진', '한토우진(半島人 반도인)'이라 부르며 하대하고 차별했다. 이 공공연한 모욕은 해방 후에도 재일조선인에게 지속되었고 21세기에도 마찬가지다.
2009년 어느날, 일용직 노동자 김임만(재일조선인 2세, 영화감독)이 건축 현장에 출근했다. 자신이 늘 쓰던 헬멧에 갑자기 '가네우미(金海)'라는 일본명(통명, 통칭명)이 붙어있었다. 바닥에는 원래 붙어있던 '김임만'이라는 본명 스티커가 버려져 있었다. 관리인이 일본명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 한다. 이후 김임만은 하청업체인 건설회사, 원청인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시작했다. 2013년 오사카 지법은 "강제 사실은 인정한다"면서도 소송을 기각, 원고 패소했다.
2017년 도쿄 코마자와 대학에 재학 중이던 재일조선인 학생이 학생증에 기재된 일본명(통명)을 민족명(본명)으로 바꿔 달라고 했는데, 대학 측이 이를 거부했다. 끈질기게 요구하는 학생에게 대학 측은 '이름을 변경하는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재일조선인 학생을 응원하는 모임이 결성되었고 이들이 수천 명의 서명을 받아 대학측에 항의했다. 대학 측은 본인에게 사과를 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며 일단락되었다.
2001년 오사카시 조사에 따르면 학교에서 본명(민족명)을 사용하는 학생은 14.9%에 그치며 조사 대상 중 65.5%가 일본명을 사용하고 있다. 2007년의 교토시 조사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일본명을 사용하는 재일조선인이 59.8%라고 보고하고 있다. 대부분의 재일조선인들이 아직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이다.
창씨개명을 통해 만들어진 일본이름을 재일조선인들은 해방 후에도 가지고 있다. '통명(일본명)'이라 한다. 말그대로 '통하는 이름', '소통할 때의 이름'이다. 누구에게? 일본인에게 그렇다.
1947년 일본의 신헌법(평화헌법으로 알려진)이 공표되기 전날 일본정부는 천황의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내려 일본 국내의 모든 재일조선인에게 '외국인등록'을 강제했다. 아직 한반도에 정부가 없으니 '조선'이었다. 조선적(朝鮮籍)이라는 존재가 탄생했고 당연히 등록증에는 본명을 기재했다. 아직 일본국적자 였으니 그들은 이중의 적(籍)을 보유한 셈이었다.
이후 1952년 일본에서 미점령군이 물러나자마자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의 일본국적을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박탈해 버린다. 하지만 일본 이름을 버릴 수 없었다. 계속 일본에서 살 수 밖에 없는 피차별 난민의 신세였던 그들에게 최소한의 가림막이 필요했을 것이다.
외국인등록증 소지가 의무였던 재일조선인은 불신검문을 당해 등록증이 없으면 추방, 감금, 투옥이 예사였다. 일제강점기때부터 통제와 차별에 시달렸으니 일상생활에서도 조선사람의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서로를 통명으로 부르고 일본말로 대화하는 것이 안전했을 터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장에 취직이라도 할라치면 '조화'를 위해 경영진 측에서 먼저 일본명을 사용해 달라 권한다. 분란이 일어나는 게 싫으니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 같은 이름의 분열은 이런 경험을 내면화했고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로 전승되었다.
2004년 홋카이도 조선학교에서 촬영 할 때 고3 학생을 인터뷰했다. 쿠시로라는 시골에서 삿포로의 조선학교로 전학 온 학생이었다. 그는 쿠시로에서 일본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때까지 다녔는데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기 힘들었다. 집 여기저기에 한국에서 건너 온 인형, 서울올림픽 기념물, 백두산 사진, 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니의 초상이 있었다. 일본명으로 학교를 다녔으니 가까운 친구들도 여전히 자기를 일본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다. 조선학교로 전학 올 때는 삿포로에 있는 일본고등학교로 전학을 간다고 속였다.
2019년 한국의 시민단체와 함께 오사카의 민족학급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민족학급은 일본학교 안에 방과 후 학습 같은 형식으로 우리말과 우리글, 우리문화를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시스템이다.
내가 방문한 학교는 방과 후가 아니라 정식 학급시간이었으므로 굉장히 진보적인 학교였다. 초등학교였고 그날이 민족학급 졸업반 6학년 아이들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주제는 '이름'이었다. 민족학급의 강사인 재일동포 어머니가 손정의를 예로 들며 본명을 쓰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선택'이라는 전제를 두면서도 학생들이 민족명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을 보며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있다. 재일조선인에게 호의적인 일본공립학교 마저도 그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이름’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된 해방 민족의 상태인가? 이름을 빼앗긴 상태로 70여 년 동안 세대를 이어 살아갈 때 어떤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을까? 너의 본명은 사실 000이야, 너는 사실 조선사람이야. 지금 네가 쓰는 일본명은 너의 진짜 이름이 아니야. 갓난 아기 때 해외입양을 갔다가 성인이 되어 자기의 이름과 친부모를 찾으러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제법 본다. 결국 본명과 친부모를 찾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살아간다는 의미'는 어떻게 다를까?
일본은 재일조선인의 이름을 70여 년이 넘게 빼앗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조선학교'를 항상 '조총련학교'라 비틀어 부른다. 재일동포들은 '총련'이라 하지 '조총련'이라고 하지 않는다. 조총련이 쉬운 것은 앞뒤 다 빼고 '북과 친하다'는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설명이 필요없는 것이다. 친북 또는 종북이 본질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장미를 굳이 '빨간 장미'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미는 빨간 장미도 있지만 노란 장미도 있고 심지어 파란 장미도 있다. 대부분 빨갛다 해도 장미를 매번 '빨간 장미'라 부르지 않는 이유다. 나는 조선학교를 '조총련계학교'라고 부르는 그 태도에 위화감을 느낀다. 조선학교는 그냥 조선학교다. 정식명칭이 학교 간판에 붙어있다. 먼저 지역명을, 그다음에 조선초급, 조선중급학교 이런 식이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 이런 식이다. 통칭 '조선학교'라 부른다.
재일조선인들의 남쪽 조국은 이렇게 '부르기' 조차도 왜곡해 왔지만, 여기에 더해 '이쪽에 맞추라'고 강요한다. 이름을 간단히 빼앗는다. 잘 아는 재일동포 친구가 있다. 리정숙(가명)이라는 이름을 쓴다. 조선적이다. 조선학교를 나왔고 일본대학을 다녔다. 나이 40줄에 접어들어 처음으로 고향방문을 위해 한국영사관을 찾았다. 신원진술서에 '리정숙'이라 썼다. 평생을 써 온 이름이었다. 일본 회사에 취직할 때도 고집했고 그 때문에 불이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런데 영사관이 신원진술서를 보더니 한마디 했다. '리'를 '이'로 고치란다.
왜? 한국에서는 모두 이 한자를 '이'로 발음하기 때문이란다. 리명숙은 혼란스러웠다. 리로 발음해 왔고 그렇게 써 왔다. 한글로 '리'와 '이'는 엄연히 다르지 않나. 이명숙과 리명숙은 다른 사람이다. 반발했다. 임시여행증명서 발급의 재량권을 쥐고 있는 영사관은 화를 낸다. 당신 한국에 들어가려면 내가 시키는대로 해라. 부모에게 받은 이름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결국 조부모의 고향을 방문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재일조선인은 지금 자신의 이름 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사회에서 이름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며 살고 있다. 그렇게 지키고 있는 이름을 이번에는 조국이 거부한다. 그들은 언젠가부터 자신들을 '자이니치(在日)'라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에 거주한다'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으나 사실 '일본에 거주할 뿐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일본?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종종, 아니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그들을 '자이니치'라고 부르는 것 같다. 재일동포 스스로 자신을 '자이니치'라 칭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슬픈 그 이름을 탄생시킨 책임의 1/3은 우리에게도 있으니까. 우리가 그들을 자이니치라고 부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말 하나로 우리는 그들을 간단히 우리의 세계에서 밀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너희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아. 자이니치라는 슬픈 말은 그래서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동포'라는 따뜻한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사람에게는 발 붙일 땅이 필요하고 그 땅이 꼭 지금 딛고 사는 그 땅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땅과 그 땅에 '나를 동포라 불러주는 동포'가 있다는 위안과 희망만으로도 재일조선인은 충분히 빼앗긴 이름을 찾는 싸움을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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