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대신 스마트폰 들고 떠났다… 19세기 ‘이방인들의 아지트’ 제물포 항구로

인천/박근희 기자 2021. 9. 11.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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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아는 도시, 뜻밖의 풍경
인천 개항장 시간여행

이인화의 소설 ‘2061년’은 주인공 ‘재익’을 비롯한 2061년의 사람들이 1896년 2월 11일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조선의 제물포(인천항)로 ‘시간 탐사’를 떠나면서 시작된다. 소설 속 제물포는 가공한 이야기 속 배경이지만 당시 개항장이었던 제물포 일대를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과거로 시간 탐사를 떠난 주인공처럼 2021년에서 근대의 제물포로 떠날 수 있는 여행법이 등장했다. 지난 7월 30일 서비스를 개시한 ‘인천시 스마트투어’다. 스마트 기기에서 ‘인천e지’(AR) 앱을 켜고 지금의 개항장(인천시 중구) 일대를 돌며 제물포의 옛 모습과 역사 이야기를 AR(Augmented Reality·증강 현실)과 VR(Virtual Reality·가상 현실)로 즐기는 여행이다. 박물관과 전시관에선 스마트 기기 화면에 과거 실존했던 역사 속 인물이 등장하고, 현재의 풍경에 스마트 기기를 대면 130여 년 전 풍경이 화면에 떠오른다. 새로울 것 없어 보였던 도시가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 타임머신 대신 스마트폰 하나 들고 떠났다. ‘19세기 제물포’가 남아있는 인천 개항장으로.

스마트기기의 앱을 활용해 'AR(증강 현실)' 'VR(가상 현실)'로 즐길 수 있는 '개항장'과 1960~80년대 감성을 즐길 수 있는 '개항로'에 다녀왔다. 가는 곳마다 근현대 이야기와 추억이 소환됐다. / 그래픽=백형선

◇박물관에 ‘유령’이 살아있다

<대불호텔은 청국 조계와 일본 조계 사이에 위치한 3층 벽돌 건물이다. 제물포에서 가장 크고 높아서 바다에서도 눈에 띈다는 명소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호텔 앞 돌계단은 평소 촌로들이 앉아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며 말소린지 코 고는 소린지 분간이 안 되는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는 곳이었다. 오늘은 소총에 착검을 한 일본군 둘이 차려자세로 서 있었다.>

소설 ‘2061년’에서 시간 탐사자가 된 재익은 1896년 인물인 박진용의 몸을 빌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던 대불호텔로 간다. 사망 사건이 펼쳐졌던 소설 속 대불호텔과 달리 현실의 대불호텔에선 흥미로운 체험이 기다린다. ‘AR·VR 체험존’이라고 표시된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인천e지’ 앱의 ‘시간여행’을 터치하니 가상의 인물이 별안간 화면에 ‘출몰’한다. 대불호텔을 지킨다는 ‘고스트 도슨트’. 코로나 시국에 전시해설사 자리를 대신해주는 가상의 유령 전시해설사다. 화면 속 근대 복장을 한 남성은 일본말로 자신을 “호텔 창립자이자 해운업자였던 호리 히사타로의 아들 호리 리키타로”라고 소개한 뒤 호텔의 역사와 각 공간에 대해 설명했다.

3층 연회장에서 앱을 활성화하자 이번엔 가상의 ‘무명 여가수’가 등장해 커피 예찬론을 펼친다. 개항 후 건립돼 1899년 경인선 개통으로 경영난에 빠지기 전까지, 각국 외교관과 선교사들의 만남의 장이었던 대불호텔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가베(커피)’를 판매한 곳. 드라마 ‘미스터션샤인’ 속 ‘글로리호텔’ 같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벽면엔 ‘독차음모사건’ 등 커피의 역사와 근대 커피 관련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19세기 ‘호캉스(호텔+바캉스)’의 성지였을 객실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인근 근대건축전시관에는 조선의 신여성이자 독립운동가였고,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알려진 김란사(金蘭史)가 기다리고 있다. 앱으로 소환한 VR 속 그녀는, 개항장에서 일하는 남편 덕에 외국 문물을 접하고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뒤 조선 여성 최초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야기를 비롯해 귀국 후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비밀 여성독립단체인 ‘이문회’를 지도하다 유관순을 만난 사연을 들려준다.

제물포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VR 김구 선생'. / 인천e지

이 밖에 누들플랫폼에서는 백범 김구가 인천과의 인연에 대해 얘기하고, 인천아트플랫폼에선 미국인 선교사 아펜 젤러가, 중구청에선 고종에게 헤이그 특사 파견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 학자 헐버트가, 개항 당시 각국의 경계선 역할을 했던 각국 조계지 계단에선 러시아 건축 기술자 사바틴이 고스트 도슨트로 등장해 해설을 돕는다.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지어져 현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인문학 강연과 전시 등이 이어지고 있는 제물포 구락부 내부. 스마트기기를 통해 19세기 제물포 구락부의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증강 현실로 만나는 제물포 구락부

이제 19세기 제물포를 증강 현실로 체험할 차례. 개항장 중심에 있는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은 인천의 근현대사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왼쪽 청나라 구역과 오른쪽 일본 구역의 건축 양식이 확연히 다른 것이 특색이다. 옛 모습이 궁금해 AR·VR 체험존에서 앱을 활성화했다. 폰을 들고 주변을 ‘스캔’하니 개항 당시 시끌벅적한 풍경이 360도 파노라마 뷰로 펼쳐진다. 1888년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었던 자유공원 역시 19세기 풍경과 현재의 풍경을 생생히 비교해볼 수 있다.

자유공원 전망대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제물포 구락부가 있다.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1901년 지은 벽돌조 건물이다. 1914년 이후 일본재향군인회가 사용하면서 ‘정방각’으로 불렸다가 미군 장교클럽, 시립박물관, 문화원 등을 거쳐 2007년 구락부의 옛 모습으로 재현됐다. 건물 밖 계단과 입구는 드라마 ‘도깨비’의 배경으로 등장해 더욱 널리 알려졌다.

이제는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더 유명해진 '제물포 구락부'. 호젓한 산책로 끝에 자리 잡고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제물포 구락부 2층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괘종시계의 화면부터 ‘터치’할 것. 화면을 통해 과거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곳에서도 인천e지 앱을 실행하면 구락부 내부가 19세기로 이동한다. 가을의 길목에 들어선 현재의 구락부에선 이달 30일까지 ‘나무가 들려주는 인천 이야기’전이 열린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포탄을 견뎌낸 ‘강화도 초지진 소나무’부터 개항기 역사를 오롯이 지켜본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인천상륙작전 당시 집중포화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여덟 그루의 월미도 나무’ 등 인천 역사가 담긴 나무를 주제로 한 작품이 기다린다.

차이나타운의 짜장면 박물관에서도 리얼타임 드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 개항 후 번잡해진 항구에서 인부들이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밀가루 면에 춘장을 쓱쓱 비벼 먹던 풍경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시장기가 밀려왔다. 인천e지 앱은 증강 현실로 19세기 제물포를 만날 수 있는 ‘AR·VR 시간 여행’ 외 맛집 예약과 결제, 쿠폰을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I-PASS 결제’ 기능도 한다.

근대풍 전동차를 타고 개항장을 한바퀴 둘러볼 수 있는 '개항장 이야기 투어'.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초입에 잠시 멈춰 AR·VR 체험도 해볼 수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좀 더 여행하는 기분을 내고 싶다면 근대풍 전동차를 타고 개항장 이야기 투어(032-777-3773)에 나서는 것도 색다르다. 50분간 친환경 전동차를 타고 차이나타운, 대불호텔, 제물포 구락부 등 각 공간의 해설을 들으며 개항장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개항장 내 총 17개 공간 중 4곳을 골라 즐길 수 있는 ‘자유 투어’도 있다. 요금은 코스에따라 1인 1만5000원~2만원(2인 이상)이며 탑승 전 예약 필수다.

가을밤을 수놓는 인천 개항장 문화재 야행은 오는 10월 16·17일 양일간 진행할 예정이다. / 인천관광공사

가을밤 인천 개항장문화재 야행도 10월 16·17일 양일간 매일 오후 5~10시에 열린다. 문화해설사와 개항장 일대 근대역사문화자원을 둘러보는 도보투어 프로그램. 신청자에 한해 코스별 4인(1팀 기준)까지만 참가할 수 있다. 프로그램 신청을 놓쳤더라도 10월 16일부터 23일까지 문화재 야간 개방 기간 동안에는 밤 10시까지 자유 관람이 가능하다.

경동 싸리재길 '개항로' 일대는 요즘 '개항로 프로젝트'로 '뉴트로(new-tro)' 명소가 됐다. 사진은 포토존이 된 개항로통닭 골목 간판.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개항로 맥주를 맛보기 위해서라도

개항장에서 근대 여행을 멈추기 아쉽다면 1960~80년대를 추억할 수 있는 곳에서 마침표를 찍어도 좋다. 개항장에서 차로 5~10분 거리에 있는 중구 경동 싸리재길 일대 개항로는 촘촘히 얽힌 골목 사이사이 50년 이상 된 노포부터 오래된 건물들을 개조한 카페, 음식점 등이 들어서며 ‘핫플’로 떠올랐다. 개항로가 있는 인천 중구는 근대 개항의 심장부와 같은 곳. 정치·외교·경제의 중심지였으나 영종도, 송도 등으로 중심지가 이동하며 90년대 초반부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2018년 이비인후과 병원을 개조한 카페 브라운 핸즈 개항로가 들어서고 ‘개항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조용했던 동네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과거 산부인과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엔 카페이자 일광전구 쇼룸인 일광전구 라이트하우스가, 십여 년째 방치돼 있던 건물엔 전기구이 통닭을 파는 개항로통닭이 들어섰다. 인천 출신 문화 기획자들이 지역 상인들과 합심해 동네에 숨결을 불어 넣어 그 어느 곳보다 활기가 넘친다.

산부인과 건물과 원장댁을 카페와 조명 전시관으로 꾸민 개항로의 '일광전구 라이트하우스'. 이창길 개항로 프로젝트 대표가 공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개항로'의 히트 상품인 수제 맥주 '개항로'. 옛날 맥주병을 연상케 하는 갈색 병의 '개항로'라는 글씨는 54년 동안 개항로(경동)에서 목간판을 만들어온 '전원공예사' 주인이 썼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1960~80년대 감성을 살린 '개항로통닭' 뒷마당 평상은 '개항로 치맥 성지'다. 수제 맥주 '개항로'에 전기구이 통닭을 맛볼 수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개항로 프로젝트가 낳은 히트작은 인천 로컬 수제 맥주 ‘개항로’. 이창길 개항로 프로젝트 대표는 “인천 맥주와 손잡고 병 디자인부터 마케팅까지 개항로 이웃들의 영혼을 쓸어 담았다”고 했다. 옛날 맥주병을 연상케 하는 500mL 갈색 병에 적힌 ‘개항로’란 글씨는 54년 동안 이 동네에서 목간판을 만들어온 ‘전원공예사’ 주인 전종원씨가 썼고, 맥주 포스터에 등장하는 범상치 않은 표정의 남성 모델은 왕년에 인천 ‘인영극장’에서 영화 간판을 그리던 ‘삼화페인트’ 주인 최명선씨가 맡았다. 배우들 얼굴을 많이 그려 표정 연기엔 자신 있다던 최씨는 개항로 맥주의 ‘간판스타’가 됐다.

'개항로'의 촘촘한 골목, 대로변엔 50년 전통은 기본인 노포들이 숨어 있다. 50년 전통으로 옛날 방식 그대로 과자를 만들고 있는 '인천당'.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개항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음식점 어디에서든 이 맥주가 화제다. 개항로통닭집에선 전기구이 통닭에, 메콩사롱에선 베트남 요리에, 개항로고깃집에선 돼지 턱살에, 중구집에선 중화요리에 개항로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옛날 방식으로 국수를 뽑는 태원잔치국수, 50년 전통의 옛날 과자집 인천당 같은 노포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개항로에 가야 한다.

[ ‘차돌박이짬뽕’에 ‘크림 새우’… 이를 ‘꿀조합’이라 부른다 ]

개항장 일대에서 만난 맛집들

개항장 일대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중국집 '복림원'에서는 '차돌박이짬뽕'(앞)에 '크림 새우'를 먹는 이들이 많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대불호텔’ 맞은편에 있는 복림원은 인근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현지인 맛집 중 하나다. 신라호텔에서 20여 년 근무한 화교 셰프가 요리한다. 전복, 새우 등 푸짐한 해물에 차돌박이를 넣은 ‘차돌박이 짬뽕’(9000원)이 인기다. 국물이 개운하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여기에 바삭하게 튀긴 중국식 새우튀김에 하얀 크림소스를 얹어내는 ‘크림 새우’(2만3000원)가 ‘꿀 조합’으로 꼽힌다. 차돌박이 짬뽕에서 매운맛을 뺀 ‘하얀 차돌박이 짬뽕’(9000원), 유니 자장(5000원)도 맛있지만, 크림 새우와의 조합은 단연 차돌박이 짬뽕이다.

개항로와 가까운 1호선 동인천역 부근 ‘동인천 삼치 골목’엔 삼치에 막걸리 한잔 기울이려는 이들이 찾는다. 그중 50년 전통의 인천집은 이창길 개항로 프로젝트 대표가 추천하는 노포. “삼치를 회 떠서 구워 주는, 이를테면 삼치 회 구이집”이라고 소개했다. 메뉴 중 ‘순살 삼치’는 가시가 없다. 가시를 발라 먹기 싫어하는 요즘 사람들 기호에 맞춰 일일이 가시를 제거해 화덕에 구워준 메뉴다. 화덕 순살 생선구이(1만500원)를 비롯해 반반 삼치에 달걀말이, 해물파전이 나오는 인천집 코스(2만5000원) 등 메뉴 구성이 다양해 선택 장애가 생길지도 모른다.

‘쫄면의 원조 집’을 논할 때 자주 소환되는 50년 전통의 신포 우리만두 본점은 쫄면에 만두 조합이 이상적이다. 개항장에서 개항로로 가는 길, 신포국제시장 어귀에 있다. 양배추를 채 썰어 고추장 양념을 더한 기본 쫄면의 매콤한 맛을 튀김만두의 육즙과 기름진 맛이 살짝 눌러준다. 비빔만두(7000원)를 주문하면 쫄면과 튀김만두 조합을 즐길 수 있다. 신포국제시장의 또 다른 명물 원조 신포닭강정도 있으니 간 김에 들러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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