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올림픽 이끈 '럭비 히딩크'의 쓴소리 "한국 럭비, 뜯어고쳐야 더 잘 된다"

양지혜 기자 2021. 9.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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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올림픽 진출 이끈 찰리 로 코치의 '쓴소리'

한국 남자 럭비는 도쿄 올림픽에서 참가 12국 중 꼴찌를 했다. 그런데도 귀국 후 방송 출연과 인터뷰 요청이 잇따른다. 한국 스포츠가 1등만 박수받던 문화에서 벗어났다는 증거가 럭비 대표팀이다. 무관심을 98년 견디다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은 것 자체로 갈채를 받았다.

그냥 올림픽에 간 게 아니다. ‘럭비 히딩크’ 찰리 로(56) 대표팀 코치 겸 경기력 향상위원회 위원장이 있었다. 그가 짠 전술로 한국은 2019년 11월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홍콩을 꺾고 사상 첫 올림픽 티켓을 따냈고, 올여름 도쿄까지 이어졌다. 선수들은 “이분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면서 그를 절대 신뢰한다. 찬란한 꼴찌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 최근 럭비 히딩크를 찾아갔다. 정작 그는 “이번 올림픽에서 잘한 것은 10%, 못한 것은 90%”라며 신랄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사랑하니까 비판한다고 했다. 그는 벌써 2024 파리올림픽을 바라보는데 “모든 시스템을 다 뜯어고쳐야 한다. 한국 아마추어 스포츠엔 주먹구구 관행이 너무 많다”고 토로했다.

한국 럭비는 올림픽 데뷔 무대였던 도쿄 대회에서 참가 12국 중 최하위에 그쳤다. 11-12위전에서 대결한 주최국 일본과의 수준 차이(19대31 패배)도 상당히 컸다. 찰리 로 한국 코치는“상대 압박이 들어올 때 우리 선수들이 얼어버렸다. 실력이 아닌 정신력에서 밀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진은 장정민(7번)이 일본전에서 질주하는 모습. /연합뉴스

◇ “실력이 아니라 정신력에서 졌다”

럭비 대표팀은 도쿄에서 사흘간 뉴질랜드 등 5국과 맞붙었다.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경기는 마지막 일본전이다. 한국이 19대31로 졌다. “골 라인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패스를 못 해 트라이(터치다운)를 못 하거나 공을 놓치는 실수가 많았어요. 그건 정신력 문제예요. 압박이 들어올 때 어떻게 다음 플레이를 할지 빨리 판단해야 하는데, 선수가 얼어버리는 거죠. 한국 선수들 정신력은 좋은 편이 아니에요. 덩치는 큰데, 국제대회 나가면 경험 부족으로 위축되니까 ‘여기 물이 안 맞다’ 식으로 이것저것 투덜대며 패배 핑곗거리 찾기에 바쁜걸 봤습니다. 체력도 많이 부족하고요. 대표팀 정원이 13명인데 풀타임 체력 합격점 줄 선수는 4명 남짓이에요. 경기력과 상관없는 비효율적 방식으로 땀만 빼는 훈련 방식에 익숙한 선수가 너무 많아요.” 2002 월드컵 이전 한국 축구대표팀을 보는 것 같은 이야기가 쏟아졌다.

로 코치는 선수단 구성부터 허점이 많았다고 했다. “한국 선수단은 평균 연령 30세인데, 다른 나라는 보통 24세예요. 한국이 영봉패를 당했던 아르헨티나의 경우 무려 평균 22세죠. 한국 선수층이 얇아서라기보단 선발이 제대로 안 된 결과라고 봅니다. 2019년 11월 올림픽 최종예선 때는 물론이고, 이번에도 제가 선수 선발에 관여할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뚜렷한 선발 기준 없이 몇몇 선수가 연·고대에 진학하고, 이들이 또 3개밖에 없는 럭비 실업팀과 대표팀 주축을 이루는 구조를 비판했다. “작년 여름 진도에서 열린 고교 대회에 가보니 원석 같은 선수들이 도처에 뛰어다니기에 깜짝 놀랐어요. 그걸 보고 한국 럭비의 가능성을 믿게 됐죠. 한국 선수들은 아시아 레벨에선 타고난 체격 조건이 아주 좋은 편입니다. 하지만 실력과 가능성보다 ‘끈’이 우선인 지금 관행대로라면 이들이 앞으로 활약할 자리는 없어요.”

2020 도쿄올림픽에서 찰리 로 한국 럭비대표팀 코치. /도쿄=양지혜 기자

◇ “한국 럭비에 더 이상 기적은 없다”

로 코치는 럭비 강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다. 남아공은 걸음마처럼 럭비를 배우는 나라여서 네살 때부터 럭비를 했는데 대학 재학 도중 입대(남아공은 1993년까지 백인 남성만 징병 대상이었다)했다가 쇄골을 크게 다쳐 지도자의 길로 일찍 전향했다. 모국에서 대학 코치부터 시작해 프로 럭비단까지 맡으며 이름을 알렸고, 2009년 일본 럭비계에 스카우트됐다. 영상과 모션 센서 등을 활용한 데이터 분석으로 전략을 짜는 그는 일본 실업팀(캐넌)과 대학(유통경제대)팀 감독 등을 맡아 “단숨에 정상권 팀을 만든다”는 평판을 얻었다. 한국 럭비와 만남은 2013년부터. 일본 내 한국 지도자들과 어울리다 연세대·상무 등 한국 럭비팀들의 일본 전지훈련을 ‘재능 기부’ 차원에서 무료로 돕게 됐다.

로 코치의 ‘공짜 족집게 과외’는 2019년 11월 도쿄올림픽 최종 예선 때 강력한 힘을 냈다. 서천오 럭비 대표팀 감독의 SOS 요청을 받고 예선 직전 일본과 진천 선수촌을 수시로 오가는 이중 생활을 한 달간 했던 그는 중국·홍콩 등 경쟁국들 경기를 비디오로 분석하면서 맞춤형 전술을 짰다. “당시 대한럭비협회는 한국이 올림픽에 갈 거라고 전혀 기대를 안 했지만, 저는 된다고 확신했죠. 대회 직전 첫 경기부터 결승전까지 선발 라인업과 교체 타이밍, 경기별 전술을 한꺼번에 정리해서 선수들에게 알려주니 모두가 이런 세밀한 준비는 해본 적이 없다고 놀라워했어요. 결과가 예상했던 대로 다 됐고요. 그날 비가 왔는데 하늘도 한국의 승리를 도와주는 그런 비였어요. 거친 날씨일수록 한국 선수들이 몸으로 밀어붙이는 육탄공세가 더 위력을 발휘했거든요.”

한국 남자 럭비 대표팀이 2019년 11월 도쿄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홍콩에 12대7 역전 우승을 차지하고 환호하는 모습./대한럭비협회

문제는 그 후였다. 올림픽을 욕심 낸 적이 없으니 막상 티켓을 따고도 이렇다 할 훈련 계획이 전무했다. “골프에 빗대면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겨우 우승한 선수들이 갑자기 마스터스 대회에 나가게 된 셈이에요. 한국 럭비인들은 이 현격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설상가상 코로나 사태까지 터졌다. 한국을 떠나려던 차에 최윤 OK금융그룹 회장과 만나 마음을 바꿨다. 럭비를 사랑하고 일본어에 능통한 공통점으로 둘은 의기투합했다. 최 회장이 올 초 대한럭비협회장에 당선되면서 그도 협회와 처음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다.

찰리 로 대표팀 코치(오른쪽)와 럭비 대표팀 주장 박완용 선수는 2020 도쿄올림픽 마지막 경기였던 일본전이 끝나고 텅 빈 그라운드를 한참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패배의 아쉬움을 삼켰다./도쿄=양지혜 기자

“한국 럭비에 더는 기적은 없어요. 도쿄 올림픽 출전권에 기적을 다 썼기 때문이죠. 이제는 제대로 해야 해요. 선수 육성과 선발 과정, 훈련 방식 등 모든 것을 싹 바꾸기 위해 향후 2년간 전력을 다할 겁니다. 가능성을 봤기 때문에 남아공과 일본에 이어 한국이라는 세 번째 도전을 선택했어요. 내년엔 럭비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이 있고, 이듬해엔 파리올림픽 예선전이 있어서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기입니다. 절박한 기회예요. 제가 외국인이고, 한국 럭비계에 두루 네트워크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들을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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