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재앙에 잃어버린 도시 문명은 계속된다

강구열 2021. 9. 11.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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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전성기 화산 대폭발로 사라진 폼페이
살아남은 자들, 인근 옮겨 생활 연속성 유지
한때 인구 100만명 '메가폴리스' 앙코르
지도자 치수공사 실패와 가뭄·홍수로 멸망
美 언론인, 사라진 도시 4곳 종말 원인 추적
"모든 도시, 확장과 폐기 순환.. 교훈 삼아야"
서기 79년 당시의 모습이 뚜렷한 폼페이 유적. 세계일보 자료사진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애널리 뉴위츠/이재황 옮김/책과함께/1만6000원

도시는 번영의 척도다. 인류가 창조한 첨단의 발전은 도시에 응축되어 표현된다. 이런 이유로 그것의 종말은 더욱 두드러지며 많은 질문을 낳는다. 도시는 왜, 어떻게 사라지는가. 종말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혹은 복구를 시도하는 건 어땠을까. 도시를 건설하고, 향유했던 도시인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미국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애널리 뉴위츠는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에서 세상에서 지워진 도시 4곳을 소개하며 이런 질문들을 깊이 들여다본다. 이탈리아 폼페이, 캄보디아 앙코르는 워낙에 명성이 높지만 대략 9000년 전 지금의 터키 중부 지역에 건설됐던 차탈회윅, 미국 미시시피강 주변에서 중세에 번성했던 카호키아는 조금 낯설다. “우리는 극적인 소멸의 순간에만 집중하고, 그 오랜 생존의 역사를 잊는다”고 서문에 썼듯 저자는 도시 종말 원인과 함께 도시인들의 평범한 삶을 탐구한다.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오랜 세월 유지했던 방식을 이해할 때, 그들이 왜 자기네 도시를 죽게 하는 선택을 했는지 헤아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사라진 도시는 반면교사로서의 가치를 갖게 된다.

폼페이만큼 극적인 종말을 맞은 도시는 없을 것이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은 번성하던 이 도시를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캐스트’(화산재 속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석고상)의 몸짓과 표정에는 죽음의 순간 그들이 느꼈을 고통이 너무도 생생해서 ‘대폭발 이후’를 떠올리는 게 쉽지 않지만 폼페이는 재앙을 피한 사람들을 통해 이어졌다.

사실 폼페이는 “베수비오 분출 이전에 이미 재난의 화신”이었다. 종말 17년 전 나폴리만의 지진과 쓰나미로 도시 상당 부분이 파괴된 상태였다. 하지만 보수, 개선이 노력이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폼페이는 건설 중인 도시”였다. 책은 지진 이후 폼페이의 풍광은 소매점 중심의 변화가 일어나 세탁소, 빵집, 식당 등이 거리 곳곳에 들어섰다고 소개했다.

이런 경험에 비춰보면 폼페이를 재건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을 품어볼 만하다. 당시의 로마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제국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재앙의 규모는 현대의 기술과 장비를 동원해도 수습이 어려운 수준이었고, 무엇보다 로마는 “폼페이는 총력 복구 활동을 벌일 만큼 충분히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애널리 뉴위츠/이재황 옮김/책과함께/1만6000원
다만 일종의 ‘난민 대책’은 세워졌다. 폼페이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나폴리, 쿠마에 같은 인근 도시로 몰려들어 새출발을 도모했다. 저자는 “(당시) 로마 정부의 대응이 21세기 초 민주국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과 흡사하다는 데 놀라게 된다”고 밝혔다. 화산 폭발로 세상을 떠난 이들 중 상속자가 없는 경우에는 그 재산을 난민들을 위해 쓰게 했다. 또 난민들이 살 수 있는 새로운 주택 단지 ‘캄파니아’를 건설했다. 동병상련의 처지인 난민들끼리의 결혼도 적지 않았다. 저자는 “폼페이 사람들은 자기네가 잃어버린 도시와 비슷한 도시를 찾아냈고, 생활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가 어떤 식으로든 공적 공간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며 “폼페이의 종말은 한 도시의 소멸이 그 도시를 떠받치고 있던 문화의 붕괴를 동반하지는 않는다는 증거”라고 적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역시 폼페이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진 도시다. 19세기 앙리 무오라는 프랑스 탐험가가 ‘사라진 도시 앙코르를 발견했다’고 주장했고, 그것은 상당히 오랫동안 사실인 양 받아들여졌다. 이는 앙코르가 번영의 정점에서 일시에 사라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앙코르는 번영과 쇠퇴를 거듭하며 오랫동안 자기 자리에서 지속하였고 ‘앙코르 발견’이란 주장은 “모험담에 목말랐던 서유럽인들”에 기호에 맞춘 왜곡일 뿐이었다.
거대한 나무 속에 갇힌 듯 자리 잡은 앙코르 유적. 세계일보 자료사진
앙코르는 한때 100만에 가까운 주민, 관광객, 순례자가 모여드는 세계 최대급 도시였다. 13세기 말 이곳을 방문한 뒤 여행기 ‘진랍풍토기’를 쓴 원나라 사신 주달관은 정교한 성벽, 숨이 멎을 듯한 조각상, 번쩍이는 궁궐, 인공섬이 있는 거대한 저수지를 묘사했다. 하지만 도시는 이미 이즈음 “멸망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저자는 “(앙코르를 건설한) 크메르의 왕들은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있었고, 도시의 필수적인 수자원 기반시설을 방치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긴 시간에 걸친 ‘점진적인 재앙’이었다.

앙코르의 종말을 가져온 요인으로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치수(治水)의 난맥상이다. 1년의 절반은 엄청난 비가 내리고, 나머지 절반은 가뭄이 계속되는 극단적인 기후 속에서 살아야 했던 앙코르인들에게 물관리는 생존의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지배자들은 물을 가두었다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거대한 저수지, 도심에 물을 대기 위한 수로를 건설했다. 11세기 초 수리야바르만 왕이 “현대 장비의 도움 없이 건설된 가장 큰 저수지”로 알려진 ‘서바라이’를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앙코르의 수리시설은 훼손과 수리를 반복하며 이어졌으나 14세기 말, 15세기 초 10여 년에 걸친 가뭄과 그 끝에 들이닥친 홍수로 무력해져 갔다. 가뭄에 바싹 마른 땅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엄청난 양의 흙을 깎아냈고, 그것은 쓰레기와 함께 흘러들어 수로를 막았다. 필요할 때 물을 공급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에 외국 군대 침입, 정치불안 등 내우외환이 이어지며 앙코르는 매력을 잃어갔다. 상층 계급 사람들이 먼저 떠났고, 하층 계급 사람들이 남기는 했으나 고대의 가장 화려했던 도시는 점진적으로 쇠락했다. 저자는 “도시는 서서히 쭈그러들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수백 년에 걸쳐 빠져 나갔다”며 “모든 도시는 맹렬한 확장과 폐기의 순환을 오가며 끊임없이 휘둘리도록 돼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적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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