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대사 환영, 마오가 더 기뻐해" 저우언라이 전화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3〉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중국의 국·공 분쟁에 골머리를 앓았다. 1945년 12월 15일, 6년간 육군참모총장 역임한 조지 마셜을 특사로 낙점했다. 마셜은 버지니아주 리스버그의 농장에서 만년을 즐기려던 계획을 접었다. 모셔뒀던 원수 복장 입고 중국으로 떠났다. 국민정부 배도(陪都) 충칭(重慶)과 중공 근거지 옌안(延安)을 오가며 조정에 나섰다. 3주 만에 국·공 쌍방이 정전에 합의했다. 이듬해 3월 27일, 전운이 감돌던 동북지역의 정전협정 서명도 받아냈다. 마셜은 중국과 중국인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남의 간섭 받기 싫어하고, 남의 일에 끼어들기 귀찮아 한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보고차 워싱턴으로 갔다. “임무 완성이 임박했다”며 허리를 폈다.
마셜, 중국으로 날아가 국·공 정전 이끌어
4월 하순 스튜어트가 상하이에 나타났다. 볼일 보고베이핑(北平)행 비행기에 탑승할 무렵 비서가 달려왔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위원장이 보낸 전용기가 대기 중이다.” 장은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함께 사저에서 스튜어트를 만났다. 동향 사람 만나기가 너무 힘들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두 사람은 저장(浙江)성 출신이었다. 저장 방언으로 얘기꽃을 피웠다. 무슨 말인지 몰라 지루해하던 쑹이 영어로 끼어들었다. 스튜어트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쑹메이링이 마셜을 만나보라고 권했다. 중국의 운명에 관심 많은 5성장군이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동했다. 쑹의 주선으로 만난 마셜은 정전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합의 며칠 후 전쟁을 일으킨 중국 지도자들은 국제사회에 동참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며 자문을 청했다. 나는 부르면 언제건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베이핑에 돌아온 스튜어트는 옌칭(燕京)대학 일에만 전념했다. 자주 만나자던 마셜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2주일 후 난징에서 만나자며 전용기를 보냈다. 스튜어트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마셜의 첫마디가 심상치 않았다. “선생은 중국에서 태어났다. 50년간 생활하며 완전히 중국화 됐다. 미국인들은 선생을 중국인으로 대한지 오래다. 중국과 미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나도 생각하겠다. 시간이 없다. 모레 다시 만나자.”
미군 떠나자 동북 지역 피비린내 진동
이튿날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스튜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환영한다. 그간 일부 미국인들은 국민당에게만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중국인의 손을 빌려 중국인을 살해했다. 선생은 공평한 사람이다. 마오(毛·모) 주석은 나보다 더 선생의 부임을 기뻐했다.” 스튜어트는 저우의 예리한 지적에 등골이 오싹했다.
베이핑에는 미군 수십 명이 협화의원에 군사조사처(軍調處) 간판 걸고 상주하고 있었다. 중공과 자주 충돌했다. 미군은 부상자가 속출하자 철수시켰다. 미군이 자취를 감추자 동북에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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