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삶의 허무, 역사의 허무

- 2021. 9. 1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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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에는 현진건의 자취 가득
일제 강압 탓 장편 '흑치상지' 중단

하늘은 맑고 날은 적당하게 따사롭다. 추석이 멀지 않은 볕의 기운을 느끼며 구기터널 지나 세검정 길에서 좌회전, 현진건의 흔적을 찾아간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고향’ 같은 단편소설들로 이름 높은 작가, 그가 말년에 살던 곳이 오로지 집터만 남아 부암동에 있다고 했다.

상명대 쪽으로 언덕 올라가는 곳에서 좌회전을 한다. 바로 옆에 이광수의 홍지동 산장이 있지만 오늘은 그대로 지나친다.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홍지문도 오늘은 멀리 보기만 한다. 왼쪽으로 돌면 바로 석파정(石坡亭)이다. ‘돌언덕’이라는 뜻을 갖는 이곳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서’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단편소설로 널리 알려진 김동인은 여러 편의 장편소설을 남겼지만 그중에 단연 ‘운현궁의 봄’이 으뜸이다. 이 작품은 김동인이 인생에 대해 품고 있던 사유를 이하응이라는 격류 속의 인물에 풀어낸 것이다. 그는 액자소설 ‘배따라기’에서 봄에 대동강가를 거닐다 자연의 위대함에 비해 인간의 삶이란 어떻게나 작은 것인지 절감한다. 진시황을 추억하며, 그는 인간의 삶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큰 인간, ‘참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배따라기’의 인간관을 장편 ‘운현궁의 봄’으로 옮겨 절치부심 안동 김씨 세도 하의 세계를 견뎌 가는 한 위대한 존재의 행적을 그려냈다. 역사소설가로서 김동인은 고증도, 묘사도 섬세하지는 않았다. 이광수가 ‘단종애사’를 쓰고, 김동인도 ‘대수양’을 썼지만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그 스스로 척살하기 위해 나서는 장면 묘사를 비교해 보면 빠르게 쓰고 ‘뒤돌아보지 않는’ 김동인 스타일의 단점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또 그대로 자신만의 세계인식, 인간관이 있었고, 그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인식 태도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오늘따라 석파정은 가을 하늘 아래 고아한 풍취를 간직한 듯하다. 사실, 서울 쪽에서 자하문터널 지나 이쪽으로 건너오면 벌써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그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이 석파정이다. 중국풍으로 지은 석파정 별당, 여기서 흥선대원군이 난을 쳤다는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둘러보고 다시 내려와 부암동 언덕길로 올라간다. 자하문터널 들어가는 초입에 오른 쪽으로 부암동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얼추 다 올라가서 부암동 주민센터 옆의 좁은 길 따라 또 올라간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는 안평대군 저택 무계정사(武溪精舍)를 기리는 ‘무계원’이 있어 잠깐 둘러보고 좀 더 올라간다. 이제 바야흐로 빙허(憑虛) 현진건의 집터다. 표지석만 남아 있는 쓸쓸한 이 집터는 어느 사유지가 됐는지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문틈으로 보니 안으로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한 주 섰다. 담장에는 꽃송이 많지 않은 능소화가 붙어 있어 그나마 외로움을 달래준다.

단지 그뿐이어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그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워버린 ‘죄’로 말년을 불우하게 보내야 했던 그의 이름에 도무지 걸맞지 않다. 그때 실제로 붓질을 한 것은 청전 이상범이었다던가. 이 일로 현진건은 1년간 옥살이를 하고 ‘동아일보’를 그만두어야 했으며 이 부암동으로 옮겨와 닭을 치며 살았다. 좁은 길로 올라와 보면 이 현진건 집이 얼마나 높은 곳에, 외딴곳에 있었는지 실감하게 된다. 바로 옆은 전부 개발제한구역이다. 그 위로 호화로운 윤치호 별당도 있기는 있지만 벌써 세상 거의 끝에 온 듯한 허무감이 든다. ‘허무에 삶을 의탁한’ 그의 거처가 있었을 만한 자리다.

현진건은 1943년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의 그는 사업에도 실패해서 이곳을 떠나야 했고 어딘가에는 그가 미두에서 큰 실패를 보았다고도 한다. 이 좌절과 실패는 그가 말년에 쓰다 일제의 강압으로 중단된 장편소설 ‘흑치상지’를 떠올리게 한다. 현진건은 어째서 ‘무영탑’을 쓰고 이 작품으로 옮겨 갔던가. 흑치상지는 백제부흥운동의 영웅이자 내분 끝에 끝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나라로 건너가 뤄양의 북망산에 묻혔다.

언덕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경로당 옆에 부침바위(付岩)가 있었다는 표지석을 만난다. 자하문터널 길이 뚫리면서 동 이름의 유래가 된 바위조차 없어지고 표지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허무를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건널 것인가.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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