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구독의 추억
본격적인 구독시대 열려
출판계도 구독유행 합류
전자책 대여 서비스 앞장
이것저것 구독하는 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빈도가 잦아졌다. 여름엔 수제맥주와 막걸리구독을 시도해보았다. 지금은 계절마다 새로 담근 종류별 김치를 맛볼 수 있다는 김치구독을 눈여겨보고 있다. 십시일반이라고 해야 할지,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해야 할지, 한 건당으로 치면 그리 부담 없는 금액이지만, 여러 건수가 합해지니 제법 구독비용이 묵직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교문 앞에서 잡지구독 판매원에게 설득당해 ‘타임’지를 구독 계약했다. 포부만 크고 현실감각은 부족한 당시의 대학 초년생들은 호객꾼에게 잘 넘어갔던 듯하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세상사도 파악하겠다는 야심찬 의욕은 한 달도 지속되지 못했고, 이후 그 잡지는 펼쳐보지도 못한 채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구독계약을 할 때에는 내가 그것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것을 일 년치 구독료를 수업료로 지불한 덕에 알게 됐다.
졸업 후 입사해서는 떠먹는 요구르트를 배달받았다. 눈 비비고 나와 대중교통에 시달린 아침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듯 나는 내 자리에 앉아 뚜껑껍질을 벗겨내고 앙증맞은 숟가락으로 내용물을 떠먹었다.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그 휴식시간의 풍요로움 때문에 한 입씩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자리를 비우는 날에는 옆 동료에게 큰 선심 쓰며 “그거 드세요” 하고 베푸는 즐거움까지 만끽했다.
코로나 상황이 두 해째 지속되면서, 본격적인 구독의 시대가 열렸다. 이미 음악이나 영화의 소비는 음원 서비스와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등과 같이 구독의 흐름을 탄 지 제법 오래됐고, 출판계도 구독 유행에 합류했다. 대학교재 출판업체로 유명한 영국의 피어슨(Pearson)사는 최근 구독 서비스 앱을 출시했다. 책 무게에서나 가격에서 부담스러운 대학교재 1500권을 월 14.99달러에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19세기 중반에 설립된 이래 종이책 학술서의 역사와 전통에 자부심을 가져온 출판사가 전자책 대여서비스에 앞장선다니 놀랍다. 이제는 책을 소장하는 것이 아닌 활용하는 것에 값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소비추세가 변한 것이다.
미술 분야에서도 미술관과 갤러리, 개인방송채널을 중심으로 구독이라는 용어가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구글의 ‘아트앤컬처’ 사이트에 들어가면, ‘오늘의 추천’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한 점씩 친절한 설명과 함께 작품이 화면에 뜬다. 스스로를 ‘배달 작가’라고 부르는 미술가도 있다. 인천공항이나 남산타워 등 사람이 찾아올 만한 곳에 어마어마하게 큰 풍선조각을 세우는 임지빈 작가다. 그는 처음에는 갤러리에서 전시했는데, 문득 새로운 결심을 했다고 한다. 누가 관람하러 오기만을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거리로 나서서 행인에게 작품을 배달하기로.
이렇듯 창작자는 배달자가 되고, 관객은 구독자로 바뀌어간다. 구독의 추억과 더불어 십시일반으로, 또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내 취향의 역사도 만들어지는 것 같다. 취향이라는 게 선천적인 것도 아니고 또 반드시 고상한 방식으로만 습득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선택한 어떤 것이 정기적으로 나를 방문할 때 은근히 설레는 느낌, 이것을 취향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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