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기 맞은 9·11.."분열과 적대의 씨앗은 그날 뿌려졌다"
[경향신문]
미국 지식인들 자성의 메시지
“시민들 서로 의심…자유 위축
테러와의 전쟁도 사실상 실패”
2001년 9월11일, 이날을 기점으로 진정한 21세기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종·종교를 둘러싼 갈등과 정치적 분열, 극단주의가 발호하는 모습은 냉전 종식 후 낙관과 자신감 속에서 20세기를 마무리하던 시절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종료와 함께 맞는 9·11 테러 20주기를 앞두고 미국 지식인들은 “정치적 분열과 갈등은 9·11 테러 이후 20년 동안 반복된 잘못된 선택으로 벌어진 것”이라고 자성했다.
9·11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적대와 분열이다. <하늘의 유일한 비행기 : 9·11 구술사>를 집필한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가렛 그라프는 “9·11 이후 미국은 거의 모든 것이 잘못됐다”며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인들을 더 많이 두렵고, 덜 자유롭고, 도덕적으로 더 많이 타협하게 만들었으며 세계에 더 많은 고립을 남겼다”고 말했다. 그라프는 국토안보부의 창설을 대표적 예로 들며 9·11 이후 자유와 개방의 원리가 아닌 감시와 비밀주의 원리로 돌아가는 정보기관들이 미국 정부에서 힘을 얻었으며, 이는 시민사회에서도 서로 의심하고 적대하는 시선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그라프는 그러면서 “분열과 적대로 가득 찬 미국은 오늘날 백신 접종을 둘러싸고도 정치적 갈등이 벌어지는 사회가 됐다”며 “9·11 이후 싸웠던 적은 우리 자신”이라고 진단했다.
이라크 등 테러 세력과 연계된 독재자에 신음하는 국가들에 자유를 주겠다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정작 미국 시민들이 자유를 빼앗기고 위축됐다. 스펜서 에커만은 지난달 출간한 책 <테러의 지배 : 9·11 시대가 어떻게 미국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트럼프를 낳았는가>에서 9·11 이후 미국을 뒤덮은 광기가 무슬림 이민을 중단시키고 고문을 합법화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말에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현상과 관련 있다고 진단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해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국가(IS) 등 극단주의 세력은 20년 전보다 덩치를 키웠다. 미국은 자유와 정의를 명분으로 전쟁을 수행한다면서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침해에는 눈을 감는 등 미국의 명분은 약화됐다.
민주주의를 후퇴시켜 미국을 약하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는 “결국 9·11을 일으킨 오사마 빈라덴이 승리했다”며 “빈라덴은 미국이 빠져든 함정을 만들지 않았다. 우리가 직접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이러한 진단에는 오늘의 미국을 치유하려면 9·11 이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메시지들이 담겨 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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