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기록들에서 슬픔을 경험하다

한겨레 2021. 9. 10. 18:2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상혁의 OTT 충전소][박상혁의 OTT 충전소] 일본 드라마 '콩트가 시작된다'

얼마 전 배우 차인표와 <불꽃미남>이라는 예능프로그램을 했다. 방송에서 차인표는 말했다. “우리 인생을 연극이라고 생각하면, 단 한명의 관객이라도 누군가를 진지하게 지켜봐준다면 그 사람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고 절대 나쁜 선택을 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의 첫번째 관객이 되겠다.” 누군가를 지켜봐주고 응원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올해 일본 <니혼 티브이>에서 방송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콩트가 시작된다>는 인기 없는 개그맨팀과 그들을 응원하는 ‘작지만 소중한’ 관객들의 이야기다.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맥베스’라는 무명 개그팀으로 살아온 3명의 청춘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즐거웠지만, 주변의 기대에 어긋나게 살아온 시간들이다. 언제까지 할 거냐는 가족들의 걱정에 10년 정도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만두겠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어느덧 시간이 흘러 10년이 되었다. 이제 28살. 만약 10년을 더 한다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게 힘들 것이다. 이제는 정말 그만둘 때가 된 건가.

나카야마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항상 같은 시간에 와서 개그를 연습하는 맥베스 멤버들을 지켜보는 것이 삶의 원동력이다. 누구보다 더 ‘찐덕후’가 됐지만 처음 공연장을 찾은 날 맥베스는 해체를 선언해버린다. 그러고 보니, 그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그를 떠났다. 좋아하는 잡지는 곧바로 폐간되었고, 좋아하는 옷 브랜드는 망해버렸다. 주식을 사면 멀쩡한 회사가 파산하고, 남자친구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혹시 이 개그팀의 해체, 나 때문인가?

이 드라마는 형식이 매우 독특하다. 각 회차는 맥베스가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콩트로 시작한다. 사실 별로 재미없는 시시한 콩트다. “이러니 망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이 콩트의 소재는 모두 맥베스 멤버들의 인생 경험에서 나온 것이고, 각 회차의 주요한 에피소드와 연결된다. 10년 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이 콩트와 함께 퍼즐처럼 맞춰진다.

정교한 대본을 쓴 카네코 시게키는 나에게는 ‘믿고 보는 작가’다. 1975년생인 그는 주로 청춘들의 방황과 사랑을 일본 사회의 변화에 맞춰서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써왔다. 그의 작품들에 딱히 악당이 없고 배역들은 모두 사랑스럽다. 특히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주연을 맡은 스다 마사키, 아리무라 카스미, 후루카와 코토네는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청춘스타들이다. 그러나 단 한번도 아령을 들지 않았을 것 같은 현실감(?) 넘치는 몸매와 무성한 겨드랑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찌질함을 완벽히 연기한다. 드라마와 같은 시기에 개봉한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에도 함께 출연했다. 영화에서는 너무나 멋진 선남선녀의 모습이고, 흥행 스코어를 보면 영화가 훨씬 더 대박이 났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더 추천한다.

<콩트가 시작된다>는 결국 실패의 기록들이다. 그래서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겹쳐 보인다. 믿기 힘든 연전연패의 기록을 보면서 처음으로 인생의 좌절을 맞보는 어린이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느 순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슬픔을 이 드라마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콩트가 시작된다>에는 희극인들의 유머가 가득하지만 결국 비극이고, 어느 순간 함께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른 나라 이야기를 볼 것도 없이, 이제 우리나라에도 개그 프로그램이 단 하나 남았다. 평생을 개그맨으로 살아온 많은 사람들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왔다. 몇몇은 유튜브에서 대박을 치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개그맨들은 현실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하루토는 말한다. “백명이 봐준다면 당연히 기쁘겠지만 한명이 백번 봐주는 것도 똑같이 기쁘다. 심지어 더 고맙다”고. 모두의 모든 선택을 응원할 것이다. 덕분에 많이 웃었고, 나도 한때는 <웃찾사> 피디였지만 지금은 <웃찾사>의 마지막 팬클럽이기 때문이다.

씨제이이엔엠 피디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