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롭지 않아도, 가족이 없어도 '행복한 할머니'는 있다[플랫]
[경향신문]
행복한 할머니를 상상하기란 쉽다. 하지만 어린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푸짐한 음식을 먹이는 할머니 말고, 그러니까 가족에게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정서적 충만을 제공하는 역할로 규정된 할머니 말고도, 여전히 그러한지는 고민스럽다. 그러니 조금은 낯선 각도로 노년 여성을 그린 최근 소설의 아름다운 장면들에 마음이 치인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할머니, 여기 노란 버튼 누르면 어제로 돌아가. 파란 버튼을 누르면 일 년 전으로 가고, 하얀 버튼은 오 년 전으로 가고, 빨간 버튼은 구 년 전으로 가.” 윤성희의 ‘남은 기억’(<날마다 만우절>, 문학동네, 2021)에서 손자는 할머니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장난감 리모컨을 만들어준다. 자기가 아홉 살이라 구 년 전으로 돌아가는 버튼이 최대치라고 말하는 손자 앞에서 할머니는 하하 웃는다. 아직 아들 부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지도, 친한 동생 영순이 위암에 걸리지도 않았던 3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그러나 할머니는 과거로 향하는 리모컨을 부수고 손자의 망토를 뒤집어쓴 채 영순과 함께 귀여운 복수를 위한 작은 모험을 떠난다.
과학기술원의 실험실 아르바이트에서 초파리와 사랑에 빠졌던 할머니도 있다. 임솔아의 ‘초파리 돌보기’(‘릿터’ 2021년 8·9월호)의 이원영은 평생 마트 캐셔, 급식실 조리원, 텔레마케터로 쉬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을 해왔음에도 무경력 주부로 구분되는 60대 여성이다. 미진단 질병으로 극심한 탈모에 시달리지만 소설가 딸에게 자신의 인생을 해피엔드로 써달라고 부탁한다. 유별난 이야기를 원하는 딸의 요청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라면 이렇게 쓸 거야. 주인공 이름이 원영이라고 해봐”라며 남들에게는 뻔하거나 시시할 자기 인생을 자기 언어로 구술한다. 그러나 딸의 소설 속에서 초파리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오래오래 행복한 이 노년 여성의 결말은 우리 사회에서 결코 뻔하거나 시시하지 않다.
영어로 갱년기(menopause)는 월경(menstruation)과 중지(pause)의 합성어, 즉 여성이 더 이상 월경을 하지 않는 시기를 뜻한다. 하지만 여성학자 김영옥은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교양인, 2021)에서 갱년기가 단지 완경이라는 신체 변화나 호르몬 치료로 극복해야 할 위기가 아니라, “여성들이 제2의 삶으로 들어서는 중대한 전환기”이자 사회문화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담론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노화에 대해 좀처럼 말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 돌봄으로만 의미화되는 모성의 화신도 아니고, 극소수의 세련된 셀럽 멘토도 아닌, 노년 여성 개개인의 삶과 욕망을 상상하는 일은 얼마든지 더 필요하다.
갱년기에 겪는 온갖 소외감과 외로움, 열감과 고통을 통과한 이후 여성의 삶은 여전히 꿈꿀 만한 것일까? 미국 시인 메리 루플은 산문집 <나의 사유 재산>에서 그렇다고, 이것은 아름다운 멈춤(pause)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우선 당신은 무언가를 중단해야 한다. 아름다운 정신 앞에서는 언제나 멈추어 심호흡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노년은 암울한 청춘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아함과 부드러운 말들과 함께, 맨발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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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영 문학평론가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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