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비극 속 당신은 어디쯤 서 있나..이혁진의 새 장편 '관리자들' [책과 삶]
[경향신문]
관리자들
이혁진 지음|민음사|196쪽|1만4000원
“깡마른 낙엽송만 촘촘한 산과 텅 빈 밭들이 보였다. 마시멜로 같은 곤포사일리지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다. 헐벗고 가난한 풍경이었다.”
이혁진의 새 장편소설 <관리자들>은 인적이 드문 한 국도 옆 하수관 공사현장을 배경으로 한다. 새로 건설 중인 혁신도시에서 해안의 하수종말처리장까지, 땅을 파 콘크리트 하수관을 매립하는 대형 공사가 벌어지는 현장이다. 공기를 맞추라는 압박에 인부들은 모두 정신없이 일하는데, 이 무리에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다. 한때 기업의 회계팀장으로 일했던 ‘선길’이다.
공사장 일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체격도 작고 왜소한 선길은 관리자들에게도, 함께 일하는 인부들에게도 마뜩잖은 존재다. 위험한 작업엔 좀처럼 나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업 중에도 걸핏하면 전화기를 들고 사라진다. 그에겐 큰 수술을 앞둔 아픈 아들이 있다. 고된 업무를 마치고 숙소인 여관방에 돌아와서도 회계사 시험 공부를 할 만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지만, 그래도 선길에겐 이 막노동이 아들의 치료비와 생계비를 벌기 위해 절박한 일자리다.
그러던 와중에 선길은 현장에서 빠져 ‘멧돼지 보초병’을 서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인부들의 식재료를 보관하는 공사장 식당 비닐하우스가 밤마다 산에서 내려오는 멧돼지로 인해 엉망이 되니, 밤부터 새벽까지 멧돼지의 출몰을 ‘감시’하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혹한 속에 며칠 밤을 꼬박 새워도 멧돼지는 보이지 않는다. 때려잡든 덫을 놔 잡든 어떻게든 멧돼지를 잡아야 야밤의 ‘보초병’ 업무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아무리 순찰을 돌아도 멧돼지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선길은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진다. 야산에 멧돼지가 있기는 했던 걸까.
소설가 이혁진은 회사로 대표되는 계급 사회의 모순을 포착한 사실주의적 작품을 발표해왔다. 2016년 몰락한 조선업을 배경으로 회사 조직의 병폐와 부조리를 다룬 <누운 배>로 제21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2019년엔 회사로 표상되는 계급의 형상이 삶과 사랑조차 어떻게 구획짓고 변화시키는지를 그린 장편 <사랑의 이해>를 펴냈다. 이번 신작에서 그는 카르텔과 불의로 얼룩진 공사 현장, 그 안에서 각자의 ‘상황 논리’에 마주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고민과 선택을 핍진하게 그려 보인다.
멧돼지는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이 현장의 관리자들은 저마다의 이해에 따라 멧돼지라는 허상을 만들어 냈고, 변화한 상황과 자신의 이해에 따라 선길을 다시 현장에 복귀시킨다. 반년 넘게 밀린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소장은 작업 속도를 올릴 것을 지시하고, 공사는 안전은 무시한 채 그야말로 ‘날림’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사고가 발생한다.
소설은 여느 일터와 다를 바 없었던 현장이 재난의 공간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속도감 있게 그려보인다. “예전 선길이 어제가 아니면 오늘은,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려올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 멧돼지가 결국 내려온 셈이었다. 산이 아니라 소장의 머리에서 나온 그 횡액이 기어이 선길을 덮쳤다.”
소설 속 공사 현장은 철저한 계급 사회다.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고 그 힘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즐기는 ‘관리자들’, 그리고 그 힘에 어떻게든 붙어 작은 이익이라도 챙기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힘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 혹은 흥미를 위해 ‘관리’라는 이름으로 행사되고, 그 불합리를 알면서도 ‘현실 논리’에 타협하는 작은 선택들이 모여 거대한 비극을 만들어 낸다. “결국 도덕적 우월감과 도덕적 무력감은 거울에 비치는 똑같은 허상이었다. 낙관과 공감이냐, 비관과 체념이냐는 거울의 종류만 달랐을 뿐. 두 종류의 허위의식이 한 쌍의 엔진처럼 작동했다.”
소설 속 소장은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를 ‘관리의 기술’인양 이야기한다. 그 ‘기술’을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아는 그는 이 소설에서 전형적인 ‘악인’이지만, 그 어떤 비극이 발생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은 소장뿐 아니라 회사라는 조직 그 자체다. 결코 낯설다고 할 수 없는, 우리가 자주 목도해온 풍경일 것이다.
소설은 전형적인 악인들, 평범한 얼굴을 한 무심한 방관자들, 그 불합리 속에서 “자기를 중심에 놓는” 선택을 거부하고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선택을 보여준다. 여느 조직에나 있을 이런 갈등의 양상은 다소 전형성을 지닌 인물들을 통해 그려지지만, 동시에 소설은 독자에게 묻는 듯하다. 이렇듯 흔하고 흔한 비극들 속에서, 당신은 어떤 자리에 서 왔고 서 있을 것인지 말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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