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의 일을 사회적 노동으로 바꾼 재봉틀..기술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꿨나 [책과 삶]
[경향신문]
재봉틀과 일본의 근대
앤드루 고든 지음·김경리 옮김/소명출판/437쪽/2만8000원
재봉틀은 1790년 무렵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물론 최초의 재봉틀은 구조와 성능 면에서 취약했다. 한층 개량된 재봉틀은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발명가인 아이작 메리트 싱거(1811~1857)가 ‘싱거 재봉틀’로 특허를 취득하고 재봉틀 회사를 창업하면서다. ‘싱거 미싱’은 1853년 첫 제품을 판매했고 가격은 100달러였다. 2년 뒤에는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싱거는 난봉꾼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5명의 여성에게서 적어도 19명의 자식을 낳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업 수완은 탁월했다. 1858년에 가정에서 쓸 수 있는 소형 재봉틀을 개발했고 이를 점점 업그레이드했다. 1860년대에 발 재봉틀, 1880년대에는 전동식 재봉틀로 개량하면서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일본에 재봉틀이 들어온 시기는 1850년대로 추정된다. ‘유사 서구화’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1858년 미국의 외교 특사였던 타운센드 해리스가 쇼군의 부인에게 재봉틀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60년에는 도쿠가와 정권의 사절단으로 미국에 갔던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수도 워싱턴의 윌러드 호텔 세탁실에서 재봉틀을 사용하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그들은 특이한 물건에 굉장한 호기심을 보였고, 미국의 유명 삽화가였던 프랭크 레슬리는 당시의 모습을 한 장의 일러스트로 남겨놨다. 네 명의 사무라이가 소녀와 재봉틀을 둘러싼 채 넋이 나가 있는 장면이다.
이 책의 저자인 앤드루 고든은 미국 하버드대학 역사학과 교수다. 특히 일본 근대사 연구로 명성이 높다. 그의 저서 중 <현대 일본의 역사>는 국내에도 번역·출간돼 있다. 도쿠가와 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망라해 서술해낸 전작에 비해 이번 책은 한층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2012년 미국에서 출간돼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재봉틀과 일본의 근대>는 ‘재봉틀’이라는 미시적 앵글로 일본 여성의 ‘사회적 노동’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읽어낸다. 저자는 서문에서 “1950년대 일본의 기혼 여성들이 놀랍게도 바느질에 매일 2시간 이상을 소비했다는 데이터”가 책을 쓰게 한 촉매였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 개항장에는 1860년대부터 재봉틀을 갖춘 양복점과 양장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왕은 1872년 공식 석상에서 서양식 정장을 입은 모습을 처음 선보였다. 1887년 포고한 징병령은 “전 계층의 젊은 남자에게 징병 의무와 서양식 군복 착용을 부과”했다. 서양식 드레스가 귀족 여성들에게 유행하기 시작한 1880년대 중반에는 “양장점 직종에 여성들의 수요가 증가”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여성들의 ‘정신적 지주’나 진배없었던 쇼켄 왕후는 이때까지만 해도 “한결같이 전통 의상을 입었”다. 그가 공식 석상에 양장 차림으로 참석한 것은 1886년부터였다. 이듬해에 궁녀들에게 양장을 착용하도록 지시했고, 그 내용은 신문과 잡지에도 실려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때부터 일본에서 재봉과 재봉틀은 “가족과 국민과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양처현모”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아갔다.
왕후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기에 “여성들로 하여금 서양식 제복을 입고 간호사로 일하거나 자원봉사를 하도록 격려”했다. 왕후를 추종하는 여성 가운데 한 명이었던 교육자 하타 린코는 1906년 설립된 ‘싱거 미싱 재봉여학원’의 초대 원장을 맡아 “왕후의 열성적인 권고에 동의”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은 “재봉 교육에 적합한, 자립할 수 있는 여자의 사례”였다. 이 근대적 기술은 “가족을 부양할 필요에 직면한 여성”은 물론 “하루 종일 가사일을 하는 가계관리자로서의 주부에게도 적합한” 것이었다.
일본의 1930년대는 “전쟁 시기인 동시에 근대성이 심화되는 시대”였다. 물론 남성들이 이 근대화를 주도했다. ‘복장의 서구화’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1925년 도쿄 긴자의 복장 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양복 입은 남자는 전체의 67%, 여자는 그저 1%”였다. 하지만 8년 뒤인 1933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462명의 여성 중 19%”가 양장 차림이었다. “가장 성공한 재봉학교 중 한 곳”인 문화재봉여학원의 “1933년 학생 수는 1000명을 넘었고, 3년 뒤에는 3500명을 자랑”했다. ‘전시’라는 비상 시국에서 여성들은 재봉틀을 활용해 자립하기 시작했다. 1936년 아사히신문 광고에는 “여성 여러분! 올해 결심은/ 본인 손으로 돈을 많이 벌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사는 것입니다!”라는 카피가 등장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재봉틀을 “전 세계로 확산되는 근대화의 운전수이며 본보기”라고 말한다. 그것은 “(여성의) 사회생활에서 양면성”을 지닌다. 재봉틀로 대표되는 기술이 “억압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자립에 도움을 주고 제한적이지만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의 정책은 “가정 재봉의 보편성 위에 구축됐고 그것을 더욱 강화”시켰다. “재봉일을 하는 주부들을 자원으로 동원”해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국민복과 표준복을 장려”했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서술하면서 개인의 노동에서 사회적 노동으로의 변화를 읽어낸다. 여기서 ‘사회적 노동’이란 여성이 매일 반복했던 가정 노동이 경제적 가치를 갖는 직업으로 인정받는 것을 뜻한다. 그럼으로써 일본의 여성들은 ‘양처현모’라는 구태한 관념을 뛰어넘어 근대인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근대국가를 유지하는 토대의 변화로까지 설명한다. “남성에서 여성으로까지 토대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재봉틀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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