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속도를 늦추는 '슬로다운'의 시대..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책과 삶]

이혜인 기자 2021. 9. 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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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슬로다운
대니 돌링 지음·김필규 옮김 | 지식의날개 | 568쪽 | 2만9000원

세계는 계속 팽창했다. 산업혁명과 1·2차 세계대전 이후 베이비붐을 거치면서 특히 지난 100년간 팽창의 속도와 규모가 더욱 커진 것처럼 보였다. 지난 160년 동안 지구상의 인구는 두 배 증가를 (거듭)했다. 전 세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실질 가치로 따져도 10배 이상 늘어났다. 우상향 곡선은 이 세계에서 선(善)으로 여겨져왔다. 연간 GDP 성장률이 마이너스인 것은 엄청난 악재로 간주됐다.

끝없는 질주를 거듭할 것 같던 세계가 감속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세계의 속도가 느려지기 전부터 이미 감속의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됐다. 가장 단적인 예가 출산율이다. 통계청의 ‘2020년 출생통계’(확정치)에 따르면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아이 수를 뜻하는 합계출산율은 0.84명으로, 2018년 처음으로 1.0 아래로 떨어진 뒤 빠르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다. 유엔인구기금(UNFPA)이 2019년 발표한 ‘세계 인구 전망’에 따르면 글로벌 합계출산율은 2019년 2.5명에서 2050년에는 2.2명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이로 인해 세계 인구도 이전보다 40년 앞당겨진 2100년에 정점을 찍고, 감소세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지리학자인 대니 돌링 옥스퍼드대 지리학과 교수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앞으로 계속 나아가긴 하지만 전보다 더 천천히 가는 것”을 의미하는 ‘슬로다운(slow down)’으로 규정했다. 그는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분야가 슬로다운의 영향을 받고 있다”며 “모든 것이 속도를 늦추고 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인구학, 통계학, 수학 등에 능한 돌링 교수는 책 <슬로다운>에서 이 같은 현상을 통계 분석과 그래프로 설명한다. 길게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까지, 짧게는 2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부채, 데이터, 기후, 기온, 인구, 출산율 등의 분야에서 슬로다운 현상이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지 분석했다. 책에는 시간에 따른 슬로다운 정도를 보여주는 65개의 시간선 그래프가 나온다. 위상수학 원리를 활용한 것이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프의 선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가속, 왼쪽으로 이동하면 감속한다고 해석하면 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출산율 시간선 그래프를 보면 1960년대 후반 합계출산율이 6명이던 시기에 빠르게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1970년대 석유파동과 1980년대 글로벌 경기침체 때 왼쪽으로 이동한다.

영국 사회지리학자 대니 돌링은 경제성장률, 출산율 등 각종 지표의 증가세가 더뎌지는 ‘슬로다운’에 주목했다.


총량은 증가하지만, 증가율이 점차 감소해 성장이 둔화되고 감속한다는 것이 슬로다운의 핵심 개념이다. 통념상 빠르게 총량이 늘어나고 있는 것만 같은 영역에서도 슬로다운이 발생한다. 책에서는 그 첫 번째 예로 부채를 든다. 미국 내 학자금 대출, 자동차 대출, 주택담보대출 등의 증가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한다. 학자금 대출 증가 속도는 2009년 세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느려진다. 이후 가속과 감속을 거듭하면서 점차 부채 증가 속도가 느려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저자는 등록금 상승으로 인해 학생 1인당 감당해야 하는 학자금 대출 규모는 부모 세대보다 커졌는데, 미국 내에서 대학에 진학해 학위를 받는 젊은이들의 숫자 자체가 줄고 있다고 말한다. 자동차와 주택의 가격은 빠르게 상승하는데, 부의 집중화와 불평등으로 인해 소수의 부자를 제외한 개개인의 변제 능력은 그에 맞춰서 올라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부채 증가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빚이 너무 커지도록 놔두면 개인들은, 또 나아가 전체 가구들은 이를 되갚을 수 없게 된다. 다른 이들이 무엇을 사기 위해 돈을 빌릴 수 없게 되면, 사려는 자산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 “대출기관들은 점점 더 절박하게 돈을 꾸어 주려고 하지만, 결국 돈을 빌려줄 만한 안전한 사람이나 기관은 점점 줄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끊임없이 성장에 기반한 시스템 속에서 대가속이 가져오는 불가피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인구와 출산율은 맹렬한 기세로 슬로다운이 일어나고 있는 영역이다. 2019년 유엔인구기금은 2100년이 되면 세계 인구가 109억명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책에서는 인구 감속이 빠르게 일어나 이보다 적은 규모인 80억명 수준이 될 것이라는 여러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우선 선진국에서는 더 작은 가족을 꾸리는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저자는 미국의 인구는 이번 세기 나머지 기간 동안에도 계속 증가하겠지만, 2030년 이후부터는 좀 더 급격한 감속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중국의 인구는 1968년부터 이미 슬로다운에 접어들었으며, 2030년 이후에는 젊은 부모의 숫자가 줄면서 감속이 더 강해져 머지않은 미래에 인구가 감소할 것이라고 봤다. 저자는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은 폐기됐지만 출산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며 “가족의 규모에 대한 문화적인 태도가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는데, 이제 와서 이를 되돌리기는 힘들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영역이 슬로다운을 겪는 데 비해, 눈에 띄게 가속과 증가를 거듭하는 영역도 있다. 그것은 바로 기후변화와 관련해서이다. 탄소배출량과 평균온도는 가속하면서 상승하고 있다. 1807년까지 인간이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써 대기 중으로 배출된 이산화탄소의 양은 10억t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배 증가를 거듭해 100년 만에 640억t까지 늘어났다. 배출량이 두 배씩 증가하는 기간은 20년에서 15년으로 줄었다.

대부분 분야에서 ‘슬로다운’이 두드러지는 데 반해 탄소배출과 지구 평균온도는 가속도가 붙은 채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4월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비상행동을 촉구하는 한 기후활동가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탄소배출과 평균온도 증가의 주원인으로는 인구가 아닌 불평등을 짚는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 중 하나는 전 세계 인구가 증가하면서 대기 중으로 배출되는 탄소 오염도 심해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이를 적게 낳으면 전체적인 공해도 줄 거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며 이것은 잘못된 통념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몇 세기 동안 대기에 인공적으로 배출된 탄소의 거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일어난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그동안 역사적 기록을 보면 세계 인구에서 아주 적은 수가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장소에서 더 많이 오염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구온난화는 기우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과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데이터는 “온도 상승은 대부분 최근에 일어났고, 아직까지는 슬로다운 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인식을 더 확실히 해 주는 그런 데이터들”이다.

<슬로다운>은 2018년 12월 출간돼 화제가 된 <수축사회>를 연상케 한다. <수축사회>는 세계가 2000년대 초반 전 지구적 호황 이후 2008년 전환형 복합위기를 맞으면서 본격적으로 수축사회에 진입했다며, 이에 맞춰 우리 사회의 구조를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축사회>는 우리 사회가 인구는 감소하지만 물품과 서비스의 공급과잉, 경기부양을 위한 유동성 공급으로 인한 부채의 덫에 빠질 수 있다는 어두운 전망과 경고를 담았다.

<슬로다운>은 우리가 슬로다운이라는 세계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여러 면에서 슬로다운은 대가속 시대 이전의 정상상태로 우리를 돌려놓을 것”이라며 낙관적인 전망을 펼쳐놓는다. 장기적으로 보면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적 평등지수가 좀 더 높아질 것이며, 환경오염도 덜해지는 지속 가능한 사회로 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슬로다운은 역사의 종말도, 구원의 시기가 도래한 것도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주택이나 교육 면에서 조금 더 안정을 누릴 것이다. 또 과거보다는 부담스러운 일을 덜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유토피아로 가고 있는 건 아니다. 안정화로 가고 있을 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불평등과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고, 기후위기가 가속화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슬로다운을 통한 자정작용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장밋빛 미래를 강조하는 <슬로다운>의 결론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변화하는 세계에 맞는 정책적 개입, 제도적 변화도 함께 모색할 시점이 아닐까.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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