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눈으로 그리고 귀로 완성하는 공간의 정체성

한겨레 2021. 9. 1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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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임지선의 브랜드로 공간 읽기]브랜드로 공간 읽기
콩치노 콩크리트·아다지에토 등
음악 활용해 공간 정체성 완성
브랜드 경험 필수 요소로 인식
콩치노 콩크리트의 공연장. 임지선 제공

첫사랑과의 강렬한 첫 만남을 떠올려보자. 어떤 것을 기억해내는가? 대개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말했는가 하는 구체적인 시각적 기억보다 눈빛, 말투, 목소리, 향수, 그때 그곳의 음악, 온도, 이런 비시각적인 감각의 경험만이 떠오른다. 하나 더, 여행을 갔을 때 어느 특정한 도시나 공간에서 들었던 음악을 통해 오래도록 그 여행을 추억한 적은 없는가?

희미해져 가던 기억이 단 하나의 곡으로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는 경험을 분명 해봤으리라. 공간에서 기억되는 경험은 시각을 포함한 오감으로 느낀 분위기에서 기인한다. 그중에서도 청각, 음악이 빚어내는 분위기와 경험의 몰입도는 유독 남다르다. 우연히 켜둔 음악을 듣다가 클럽에 간 듯 차오르는 흥을 주체 못 한 적 있거나, 작은 차 안 노을 지는 고속도로에서 가보지 못한 미국의 하이웨이 66번 도로를 달리는 듯한 기분을 만끽한다거나… 이 모두 음악이 주는 특별한 몰입감에서 비롯된다.

공간이 곧 거대한 음악

브랜드를 완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정체성(Identity)이다. 브랜드가 가진 철학, 스토리텔링, 분위기와 지향점은 모두 정체성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사실 또렷하고 분명한,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갖기는 쉽지 않다. 우리도 마찬가지고, 브랜드 역시 그러하다. 그때, 음악은 고유한 분위기와 경험적 몰입도, 잊히기 어려운 인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즉 차별화된 정체성을 만들어내거나,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트리거(방아쇠)가 되는 것이다.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요소, 음악이다. 음악으로 정체성을 만든 공간, 새롭게 생겨난 공간을 맘껏 들으러 가보자.

들어서자마자 귀보다 심장을 울리던 공간, ‘콩치노 콩크리트’는 음악 감상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부드러운 회색 콘크리트로 지은 이 건물은 경기 파주에서도 더 깊숙이 들어간 임진강 변에 있다. 1층은 필로티 구조의 주차장이자 외부 공연이 가능한 공간으로, 2층은 주 공연장, 3층은 개별 관람장, 그리고 4층은 주거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 독일, 미국 등지의 스피커 외에도 수많은 빈티지 오디오로 이루어진 공연홀 무대는 스피커 하나가 아닌 여러 스피커가 하나씩 조율해 내는 거대한 음악 그 자체로 느껴지기도 한다.

카메라타의 내부. 임지선 제공

감탄했던 점은 주 공연장인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중간중간에도 감상할 수 있는 숨겨진 장소를 만들어냈다는 것. 다 같이 때론 혼자서도 부족함 없이 음악을 듬뿍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치 산책하듯 수직과 수평의 반복이 이어지며 새로운 공간과 공감각을 계속해서 발견해 낼 수 있도록 섬세하게 설계된 이곳은 음악과 건축이 어우러진 곳(시각과 청각, 촉각이 만나는!)이란 생각이 들었다.

벽 한쪽을 가득 메운 음반들은(분명 이게 끝이 아니겠지!) 클래식과 연주 음악, 재즈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저녁놀이 물드는 시간에는 임진강 너머의 풍광과 부드러운 썰물이 어우러져 음악 그 이상의 경험도 할 수 있다. 문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으로, 코로나 때문에 많은 공연과 전시를 마음에 품고 있으나 아직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 한다.

공간의 청각화

여덟 판서가 살았다 하여 팔판동, 유서 있는 집과 역사 깊은 이야기가 서린 동네에 새로운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6월에 생겨난 ‘아다지에토’ 역시 전통과 현대가 부드럽게 엮인 곳이다. 아다지에토는 50년이 넘은 노후 주택을 서가 건축에서 리모델링한 곳으로, 1층은 주거 용도로, 2층은 음악 감상을 위한 사랑방으로 열어 두고 있다. 으리으리한 스피커와 오디오로 압도되는 느낌이 아닌 온화하고 아늑한 분위기. 이곳을 운영하고 계신 사장님 역시 백발의 노신사로, 천천히 차를 내리고 음반을 올려주는 그 모든 행위마저 음악의 일부가 된다. 안쪽 벽엔 꼼꼼하게 좋아하는 음반을 채워놓으시고 매일같이 공간에 맞게 오디오를 조율하신다고. 공간의 벽면에 걸린 작품처럼 다양한 장르의 전시 역시 꾸준히 계획하고 있다 하니, 음악을 포함한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쳇 베이커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엘피(LP)로 들으며 창밖으로 퍼져나가는 음악을 느끼다 보니 어느덧 이 공간의 유속은 아다지에토, 말 그대로 조금 더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공간 자체도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파주에 있는 황인용의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는 엠제트(MZ) 세대에게 음악감상실의 매력을 널리 알린 곳으로, 공간의 정체성을 만드는 음악을 말하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콩치노 콩크리트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파주의 음악감상실이라면, 파주의 오랜 터줏대감 같은 음악감상실은 분명 카메라타일 것이다. 카메라타를 떠올리면 소리가 홀을 가득 메우고 모두가 오디오를 향해 고요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음악을 감상하던 첫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그때 들었던 클래식은 아직도 이 공간을 기억하게 하는 나만의 비밀 장치이다.

아다지에토의 감상실. 임지선 제공

소리는 오래간다

브랜드가 사라져도, 음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어렸을 때 광고에서 듣던 광고음악은 아직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흥얼거릴 수 있지 않나. 비록 그 브랜드가 사라졌다 해도 말이다. 그만큼 음악이 갖는 존재감과 정체성은 어마어마하다(JYP엔터테인먼트의 음악이 시작할 때마다 붙는 “제와피”, 또는 용감한 형제의 “브레이브사운드”는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상품과 달리 이동하는 데 제약이 있는 공간은 브랜드로 인지되기 위해 그만큼 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다.

청각, 후각, 풍부한 시각적 설계와 같은,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채우는 음악은 현대에 들어와서는 브랜드로서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여겨진다. 총체적 공간 경험의 끝판왕, 호텔 브랜딩에서는 조향을 통한 향기 개발과 고유의 사운드트랙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발전될 만큼. 더 긴밀한 유대관계를 만들고 고유한 기억을 심어주는 음악, 귓가에 또렷하게 들려주는 분위기는 어쩌면 음악만이 만들 수 있는 정체성일지도 모르겠다.

임지선 브랜드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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