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북적]한반도는 130년전에 이미 분단의 길을 걸었다

2021. 9. 10. 08: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양선의 출현부터 한일합병까지
열강의 각축장,한반도는 지금의 뿌리
대원군 쇄국정책은 국내 저항세력용,
병인양요, 신미양요 위정척사로 흡수
고종의 대일관, '중화질서내 교린' 한계
일, 영국과 조약 개정후,패권 야심 노골화
급변하는 국제환경, 조선 감당못해, 탈락
“조선은 서세동점의 본격화가 이루어지는 19세기 중엽부터 대략 10년 단위의 무력 충돌에 직면했다. (…) 프랑스, 미국, 일본, 영국, 중국, 러시아, 조선이 경험한 40년 국제 환경은 당시 한반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변곡점으로 가득 찼고, 결국 국제 사회에서 탈락하고 말았다.”(‘근대 조선과 세계’에서). 사진은 인천 각국 조계내번화가.

19세기말 서세동점 시기, 서구열강의 개항 요구에 문을 걸어잠근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평가가 엇갈린다. 개항에 순순했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강고했다. 대원군은 애초 그렇게까지 비타협적이진 않았다. 심지어 천주교에 호의적이기까지 했다.

대원군은 1860년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하자 포교활동을 벌이던 프랑스 주교와의 면담을 잡았다. 프랑스를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보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안동 김씨 세력이 정치 공작에 나섰고, 대원군은 무관함을 증명하기 위해 천주교 탄압을 시작했다.

최덕수 고려대 명예교수는 ‘근대 조선과 세계’(열린책들)에서 대원군은 쇄국주의자라기보다 권력 유지를 위한 현실 정치가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왕권 강화를 위해선 어떤 충격적 정책도 동원하는 정치가라는 것이다. 대원군 집권기 국내 정치적 상황이 강경국면으로 결정된 측면이 개방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났다는 게 최 교수의 분석이다.

저자는 조선이 처음 세계와 만난 1860년대부터 일본에 병합될 때까지 40년간에 주목한다. 지금과 같은 세계가 시작된 때가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한국 근대가 시작된 여러 사건들을 국내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열강 각국의 입장과 의도를 살피는 국제 관계사 측면에서 들여다본다.

1871년 신미양요는 미국으로선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한 건국이래 최초의 해외원정이었다. 미국은 당초 프랑스에 공동원정을 제안했으나 프랑스는 앞서 병인양요로 만족했다. 영국과 일본은 공동 참여를 희망했지만 영국은 자국 해군 사령관의 거절로, 일본의 제안은 미국 공사가 응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미국의 제안이 특별한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 조선은 정보부재와 미국의 막강한 화력에 속수무책으로 파괴당했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대원군은 위정척사를 내세워 저항세력을 흡수시켰다.

그렇다면 단단했던 척사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5년 만인 1876년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는 개방으로 확 바뀐 걸까?

저자는 당시 일본과 조선의 국내 정세 변화에 주목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군벌과 신정부가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고, 조선은 고종의 친정체제로 전환한 과도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의 과제는 대내적으로는 신집권 세력의 권력기반을 굳히는 것이었고, 밖으로는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과 조선과의 외교 관계 회복이었다. 황제 체제의 일본은 전통적인 교린 한일 외교문서양식 대신 조선보다 한 등급 높은 나라를 표시한 서계를 보냈고, 이를 조선이 거부하면서 ‘정한론’이 등장하게 된다.

1873년에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정한론이 구체적으로 추진됐으나 내부 권력투쟁으로 무산됐다. 바로 ‘메이지 6년의 정변’이다.

저자는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와 내치를 우선시한 오쿠보 사이에 조선 문제는 다만 일본이 시급히 처리해야 할 여러 정책 가운데 어떤 정책을 먼저 집행할 것인가의 정도의 차이 밖에 없었음을 지적한다. 정한론이 좌절되면서 사직했던 참의들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나면서 메이지 정부는 불만을 국외로 돌릴 필요성에서 1874년 5월 타이완 침공, 1875년엔 러시아와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을 체결하고, 이어 윤요호 사건을 도발, 정한론을 실현하게 된다.

조선에선 일본의 황(皇)과 칙(勅) 형식의 서계문제를 두고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중심에 고종이 있다. 대일 외교를 풀어가려한 고종은 올라온 서계를 일단 접수하자는 입장이었지만 여전히 반대에 부딪혔다. 수호조약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일본의 윤요호 사건에, 최익현이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반대했지만 고종은 ‘양인은 양인이고 왜인은 왜인’이라며 수교에 나선다.

저자는 “고종의 ‘조일수호조규’ 인식이 중화질서 속의 전통적인 교린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이로써 메이지 정부는 전쟁이 아닌 외교를 통해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국내 정치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고, 조선은 힘의 우위에 따른 불평등 조약이지만 세계 자본주의 시장 체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됐다는 평가다.

책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열강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각국의 입장에서 입체적으로 살폈다.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놓고 중국과 일본의 싸움에 서양 열강의 셈법은 달랐다. 특히 영국이 제시한 ‘조선분할점령론’(1894년)은 지금 한반도 분단의 기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자국의 지지를 부탁받은 영국은 중재가 지지부진하자 중국과 일본에 한반도 분할 점령을 제시한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점령하며, 일본은 서울과 제물포에서 철수해서 수도의 남쪽 지역을 점령하며, 중국은 현재 주둔지로부터 벗어나서 조선의 북쪽 지역을 점령한다’는 게 골자다.

중국은 동의했지만, 일본은 겉과 속이 다른 모양새를 취했다. 영국과 불평등 조약 개정을 앞둔 일본은 겉으론 영국의 제안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이면으로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영국과의 새로운 통상 항해 조약에 성공하자마자 1894년 7월23일 새벽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뒤이어 아산만에서 중국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청일전쟁과 일본의 아시아 정복의 시작이다.

책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편입시킨 배경인 영일 동맹이 왜 등장했는지, 미국에 조선은 무엇이었는지, 한국의 자주독립을 명분으로 내세운 일본이 어떻게 열강으로부터 식민지배 승인을 받았는지 등 한반도의 운명을 저울질한 열강들의 움직임을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촘촘하게 그려냈다.

이윤미 기자

근대조선과 세계/최덕수 지음/열린책들

meelee@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