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결혼선물로 준 덕에 살아남은 동서양 이상향 비경

노형석 2021. 9. 10.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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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운명][작품의 운명] 백남순 1936년작 '낙원'
여덟폭 병풍 형식 유화 대작
전통산수 속 서양화풍 인물·집
1930년대 엘리트 여성 화가가
친구 민영순에게 준 결혼선물
망실 짐작됐지만 1981년 발견
이제는 '이건희 컬렉션'으로
국립현대미술관서 관객 맞아
화가 백남순의 대작 <낙원>. 노형석 기자

“낙원이네!”

일행이 그림을 처음 열어보는 순간 똑같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가로가 3m 넘고 세로는 2m에 육박하는 큰 화폭에 희한한 유토피아 세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 전통 산수화에 흔히 보이는 높은 산들과 깊은 계곡, 유장한 강물 등이 배경으로 그려졌는데, 묘사된 대자연 사이사이로 들어간 집과 남녀 인물 모습은 영락없는 서양화풍이 아닌가. 놀라운 건 서양식 유화인데도 가로 40여㎝의 캔버스 8개에 경첩을 박아 이어붙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얼개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40년 전인 1981년 7월8일, 서울 동부이촌동 한강아파트 어느 거실과 옥상에서는 한국 미술사에 길이 남을 발견의 순간들이 이어졌다. 이날 처음 모습을 드러낸 명작은 나혜석(1896~1948)과 함께 한국 근대 여성 화가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백남순(1904~1994)이 1936년 그린 <낙원>. 이 작품이 그의 친구였던 민영순의 아파트 자택에서 40여년 만에 학계 인사와 미술잡지 취재진에게 공개된 것이다.

1920년대 가명학교 교사 시절의 민영순(왼쪽)과 백남순.

그 며칠 전 민영순의 딸로부터 처음 제보를 받은 <계간미술>의 취재기자 윤범모(현 국립현대미술관장)와 사진기자, 이종석 주간, 미술사가 이구열이 흥분을 누르며 거실에 나온 작품을 살폈다. 누렇게 세월의 때를 타고 경첩이 삭긴 했지만, 망실됐다고 짐작했던 해방 이전 백남순의 유일한 진작이 낙원의 이미지를 빛내며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일행은 이론의 여지 없이 그림 제목을 <낙원>으로 정했지만, 이내 고민에 빠졌다. 사진을 찍어야 했지만 거실에 큰 병풍식 작품을 온전히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논한 끝에 옥상 바닥에 펼쳐놓고 찍기로 했다. 당시 윤범모 기자는 사진기자와 함께 <낙원>을 짊어지고 아파트 계단을 힘겹게 올라갔다. 윤 관장은 “명작을 찾으러 왔다가 생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여러 첩 접힌 그림은 어깨를 짓누를 정도로 무거웠다”고 회상했다. 옥상에서 이글거리는 여름 햇살 아래 그림을 세워 한첩한첩 펼친 뒤 도판사진을 찍었다. 그림 뒤로 멀리 남산의 서울타워가 배경에 끼어들었다. 세상에 다시 나온 <낙원>의 첫 사진은 이런 사연을 안고 태어났다.

<낙원>의 오른쪽과 가운데 부분. 고봉 사이로 폭포가 쏟아지고 원근감을 주면서 산야 사이로 아련하게 펼쳐지는 강과 호수 등의 이미지는 전통 산수화의 도상이다. 하지만 자연 속에 소품처럼 등장하는 남녀와 모자, 고기 잡는 사내의 모습 등은 서양 회화에 묘사되는 소재들이란 점에서 동서양 그림의 도상이 한데 뒤섞이고 융화된 느낌을 준다. 노형석 기자

<낙원>은 지난 7월부터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1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작 특별전 들머리에서 관객을 맞고 있다.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와 프랑스 파리 유학을 마치고 1920~30년대 1세대 엘리트 화가로 활약했던 백남순이 1930년대 말 전남 완도에 신혼살림을 차린 친구 민영순의 결혼을 기념해 선물로 보낸 작품이다. 그냥 보면 8폭 병풍 형식의 다색 산수화 같지만, 자세히 보면 곳곳에 야자수 모양의 나무와 서양식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나 누드상, 거친 어부의 상 등이 거닐고 있다. 흔히 ‘아르카디아’로 통칭되는 서양의 이상향 전통과 동양의 무릉도원이나 무이구곡도 도상의 전통이 뒤섞여 있다.

1936년 작품을 그릴 당시 백남순은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일하던 남편 임용련(1901~? 1950년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과 함께 이중섭 등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근대 회화를 창조하고 실험하겠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1930년 2년째 유학 중이던 파리에서, 미국 예일대를 수석 졸업하고 파리로 감상 여행을 왔던 임용련을 만나 현지에서 바로 결혼하고, 조선 최초의 부부 화가가 됐던 그들은 당대 최고 지식인 예술가들이었다. 세계 미술사에서 거의 전례를 찾기 힘든 서양식 캔버스로 만든 병풍화에 동서양의 이상향적 도상들을 한데 모아 집어넣은 것은 그들의 창작열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취라 할 수 있다.

백남순은 프랑스 유학 직전인 1920년대 가명학교 교사 시절 친자매처럼 정을 나누었던 동료 민영순에게 선뜻 대작을 선물했다. 그 덕분에 <낙원>은 해방 이후 전쟁으로 모두 사라진 백남순과 임용련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온전히 세상에 남을 수 있었다.

1930년대 백남순의 대작 <낙원>이 전시됐던 평북 정주 오산학교 박물관 내부의 옛 모습. 도자기들이 놓인 탁자 너머로 병풍 모양으로 펼쳐진 <낙원>의 화폭이 보인다. 오산고교의 <오산학교 70년사>에서 실려있는 사진이다.

흥미롭게도 <낙원>은 1930년대 정주 오산학교 박물관 내부에 전시됐던 당시의 옛 작품 사진으로도 함께 전해진다. 서울 보광동으로 이전한 오산고교의 <오산학교 70년사>에 실린 옛 사진에서 도자기를 놓은 탁자 너머로 병풍처럼 펼쳐진 작품을 볼 수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보수·복원해 이제 기증전을 하고 있는 실제 작품과 비교해보면 둘 사이에 놓인 80여년의 무상한 세월을 전율처럼 실감하게 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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