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없는 너른 사유의 들판에서
최민 글 집대성한 유고집
속물주의·허위의식 거부한
경계 넘나드는 성찰과 의식
글, 최민
최민 산문
최민 지음 l 열화당 l 3만8000원
가신이의 발자취를 좇다보면 높은 산을 올려다 보기도 하지만 너른 들과 만나기도 한다. 닿기 어려워 바라만 봐야 하는 드높은 산보다, 드넓은 들판에서 조우하는 수많은 광경과 면모, 풍요로움과 황량함이 더욱 반갑고 애절하며 따사롭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여서가 아닐까. 나약함을 딛고 꾸준히 삶을 가꾸며 나아가는 것, 부족함을 인정하여 그럼에도 꿋꿋이 견디어내는 것, 그 여정에서 때로 멈춰서기도 다시 나아가기도 하는 것, 여기에 인간의 진면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최민(1944~2018)이 곳곳에 흩뿌린 글들을 모아 펴낸 <글, 최민>의 서문이 ‘너르고 느린 경각(驚覺)의 글밭에서’(이섭)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데서, 비평가이자 교육자, 기획자, 번역가, 시인으로 살다 간 그가 남긴 숱한 ‘점’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점들은 여러 갈래의 유려한 곡선으로 자유롭게 이어져 광범위한 사유들을 지금 여기에 남기고 있다.
<글, 최민>에는 없는 시를 먼저 찾아봤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시인이 될 수 없다. 천상병을 생각하며 떠오른 말이다. 내가 그렇다. 어정쩡하게 그냥 어정쩡하게 하루하루 보내면서 정말 시를 쓸 수 없을까 가끔 공상해보지만 역시 힘들다. 혹시 무턱대고 말을 조합하면, 떡 주무르듯 단어들을 주무르는 척 써재끼면, 시가 될 수 있을까. 그래, 아무 소리나 넋두리하듯 뱉어도 시가 될 수 있지, 포스트모던한, 쿨한 시, 또는 반에 반 시 등등 세상에 같잖지도 않게, 잘난 척하며.”
2005년 창비에서 나온 시집 <어느날 꿈에>에 담긴 ‘시인’이다. 시와 시인에 대한 성찰의 결과물은 넋두리 같지만, 최민의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다. ‘같잖지도 않게, 잘난 척하는’ 속물주의를 경계하는데, ‘내가 그렇다’며 자신을 일깨움으로써 다른 이들을 일깨운다. 이런 시를 쓴 이가, 이런 글을 썼다.
“현재 문화 분야에서 이른바 일본 민족주의, 나아가 양키 민족주의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것은 갖가지 유형의 한국형 민족주의가 아니라 보편주의다. 민족주의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난 보편주의로 대항해야 한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 막연한 사해동포주의나 국제주의가 아니라 보편적 시야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굳이 민족이라는 단어를 쓰자면, 민족의 직접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이해관계를 보편적 시야에서 반성해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1994년 격월간지 <공동선>(7·8월호)에 실은 ‘국제화 시대와 민족문화’라는 글이다. 오늘도 편협한 민족주의가 우리 시야를 가리고 있다. 모두가 한쪽으로 몰려갈 때 반대쪽을 가리키는 과단한 지성이 얼마나 필요한가. 이러한 지성은 ‘잘난 척’에서 나올 수 없다. 1977년 ‘전위와 열등의식’(<중앙> 117호)에서는 이렇게 쓴다.
“우리 화단 일각의 전위미술운동은 이 열등의식에서 비롯한 혼돈과 과오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서구에서 그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한국적 현실에 이 전위가 모방, 그것도 대부분 ‘겉치레만의 모방’이 되면 본래 이상으로 복잡하고 기형적인 폐단을 낳을 것이야말로 자명한 사실이다. 전위는 그 논리상 그것을 전위일 수 있게 하는 시대적, 사회적 필연성에서 비롯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
허위의식과 속물주의에서 벗어나라는 생각은 그의 일관된 철학이다. 그는 1982년 처음 발표하고 1985년 고쳐 써 <시각과 언어 2>(열화당)에 실은 ‘최소한의 윤리’에서 “비평가의 작업은 작가들의 작업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지점에서 동시에 시작”해야 하며 “비평의 참다운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평가들 자신이 만인 앞에서 벌거벗고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고 일갈한다.
미학자로서 그의 행보가 미술에 갇혀 있지 않았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허위의식을 허무는 것은 문화 예술 장르의 칸막이를 무너뜨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진영상의 해’ 유감’(<영화소식> 481호, 1998년 3월)이라는 글에서는 이렇게 썼다. “나는 문화나 예술이라는 것은 서로 다양한 인자들이 한데 뒤섞여야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일종의 잡종강세론이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영화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고 사진하는 사람들은 사진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고 문학하는 사람들은 문학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는 창의성이 나오기 힘들다.” 이에 앞서 그는 이러한 통찰을 내놨다. “이제 여러 예술 사이에 부단히 맺어지는 복잡다단한 중복적, 중층적 연계는 다른 예술과의 관계를 일체 무시한 채 한 예술만을 공략하여도 충분히 그 속성(본질?)을 밝혀낼 수 있다는 종래의 미학적 신념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고 있다.”(‘미술 속의 영화, 영화 속의 미술’, <월간미술> 1994년 8월)
칸막이를 거부해온 그가 미술평론가와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넘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영상원장(1995~2001), 전주국제영화제 첫 조직위원장(2000~2002년)을 맡은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첫 길을 열었다. 첫 기틀을 닦는 험난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 역시 자신을 드러내어 잘난 척하는 허위의식에 저항하는 가치관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900쪽에 육박하는 <글, 최민>에는 그가 1970년대 중반부터 40여년 동안 써온 글이 담겼다. 미발표 글까지 끌어모아 정리한 최초이자 유일한 최민의 저서다. 책이 한없이 가벼워진 시대에 그의 생의 통찰이 담긴 이 책은 이미지 연구와 미술비평, 사진비평, 전시평, 작가론, 영화시론, 미술사, 문학평론, 서평, 단상 등 칸막이 없이 사방팔방으로 전개된다. 최민의 족적을 감안하면, 이 책은 한국 현대 문화예술사의 가장 중요한 장이기도 하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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