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너를 찾아올지 몰라

한겨레 2021. 9. 1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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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불러주는 건 반갑다는 뜻, 이름을 기억하는 건 또 만나고 싶다는 뜻이다.

또 다른 단편 '슈퍼맨'에서는 슈퍼 할머니의 손자라 으레 슈퍼맨이라 불렀는데 정작 위급한 순간에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쯤 이야기했으면 표제작인 '지금은 여행 중'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할 테다.

그것은 이름 없는 아이들을 기억하고 찾아가고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문학의 일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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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한겨레Book] 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지금은 여행 중

김우주 지음, 신은정 그림 l 창비(2020)

이름을 불러주는 건 반갑다는 뜻, 이름을 기억하는 건 또 만나고 싶다는 뜻이다. 한데 예술은 종종 이름이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지금은 여행 중>을 읽다가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맨 앞에 실린 단편 ‘누구’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번호로 불린다. 학교는 도시 한복판에 있어 높은 빌딩이 드리운 그림자가 교실에 차갑게 내려앉아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1이니, 3이니, 11이니, 15니 하는 식으로 불린다. 갑자기 나타난 개구리 때문에 정적이 깨진 교실에서 누군가 사라졌는데 그 아이가 몇 번인지조차 모른다. 또 다른 단편 ‘슈퍼맨’에서는 슈퍼 할머니의 손자라 으레 슈퍼맨이라 불렀는데 정작 위급한 순간에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쯤 이야기했으면 표제작인 ‘지금은 여행 중’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할 테다.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인공을 ‘너’라고 호명한다. “너는 벽에 핀 곰팡이 자국을 들여다 봤어”라고 시작하는 첫 문장을 읽으며, ‘너라니, 나를 말하는 건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인도양 너머 수천 명의 타인이 끔찍한 테러를 겪는다는 뉴스보다 내 눈의 티끌이 더 아프고, 내가 겪은 것 이상을 상상하기 어려운 법이다. 갑자기 ‘너’라고 불린 순간, 독자인 나는 여름 내내 물이 새어 들어와 얼룩덜룩 곰팡이가 핀 눅눅하고 퀴퀴한 반지하 방에 홀로 남겨진 아이가 된다. 문학이 보여주는 위대한 변신의 마법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어른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월세도 전기세도 내지 못한 반지하 방에서 아이는 배를 곯고 있다. 얼마나 간절히 누군가 찾아오기를 바랐을까. 이 모든 건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길 바랐을까. 작가는 너에게 초록빛 머리를 묶고 목에는 카메라를 걸고 있는 전학생을 보낸다. 너는 전학생의 손을 잡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너의 고향 우주로 돌아간다.

김우주 작가는 첫 작품집인 <지금은 여행 중>에서 이렇듯 ‘이름 없는’ 지구의 아이들에게 누군가를 보낸다. 혹은 뜻하지 않았으나 그 누군가가 되어주는 순간을 그린다. 단편 ‘어느 날 누군가가’에서는 어른이 된 미래의 아들이 찾아온다. 병에 걸린 마흔한 살의 아빠를 찾아가려던 미래의 아들은 실수로 열한 살의 아빠를 만난다. 하지만 목표했던 지점으로 가지 않고 열한 살의 아빠와 캐치볼을 한다. 아빠가 죽고 없는 열한 살 소년은 이 순간 간절하게 아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곧 아빠가 될 미래의 아들은 “지금을 안타까워하지 말아요, 어느 날 누군가로 당신 앞에 나타날 테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자기의 세상으로 떠난다.

<지금은 여행 중>은 2021 서울국제도서전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50선’ 중 한 권으로 전시 중이다. 이 책의 아름다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것은 이름 없는 아이들을 기억하고 찾아가고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문학의 일일 테다. 초등 5~6학년.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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