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이 어렵다 불평하신다면

한겨레 2021. 9. 1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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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700주기에 읽는 '신곡'
단죄보다는 포용과 연민 강조
이 시대 구원의 기획과 통해
루카 시뇨렐리가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의 산 브리치오 성당에 그린 프레스크화 <단테 알리기에리>(부분). 위키미디어 코먼스

<신곡>의 지은이 단테 알리기에리는 1265년에 태어나 1321년 9월13일 또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단테 전문가인 박상진 부산외대 교수가 단테 700주기를 앞두고 단테와 <신곡>에 관한 글을 <한겨레>에 보내왔다. 박 교수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단테×박상진> <단테가 읽어주는 ‘신곡’> <사랑의 지성: 단테의 세계, 언어, 얼굴> 등의 저서와 <신곡> <데카메론> <꿈의 꿈> 등의 번역서를 냈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은 읽는 책이 아니라 사는 책이라고들 한다. 워낙 소문이 자자하니 호기심도 나고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해서 사기는 하는데, 끝내 읽지는 못하고 꽂아두기만 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신곡>을 완독했다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 손이라도 잡고 싶다. 많은 사람이 필생의 도전 과제로 여기는 <신곡>. 그런데 <신곡>은 왜 읽기 어려울까. 그러면서도 자꾸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테는 많은 사람이 읽으라고 <신곡>을 썼다. ‘많은 사람’이란 요샛말로 하면 대중이다. 흥미진진하고 쑥쑥 읽히는 대중 소설 정도로 생각하고 썼다는 얘기다. 사랑하던 사람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고, 그 좌절감에 정치를 시작했지만 잘나가다 한순간에 폭삭 망하고 나서, 어떻게 하면 사랑을 되찾고 어떻게 하면 세상을 잘 돌볼까 고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일단 사람들 관심을 끌 법하다.

<신곡>은 단테가 어느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밤새 숲을 헤매다 언덕 저편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고 무척이나 기뻐 달려가지만, 갑자기 짐승 세 마리가 나타나 길을 가로막는다. 그놈들에 밀려 다시 숲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에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저 언덕 위는 천국인데, 거기로 가려면 지옥과 연옥을 우선 들러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 있는 몸으로 저승을 여행하라는 말에 몸은 움츠러들어도, 평소 흠모하던 선배 작가만 믿고 뒤를 따라나선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정치에 관여했다가 추방되어 반평생을 망명객으로 지낸 단테. 그는 죽을 때까지 귀향의 날을 보지 못한다. 대신 추적의 눈을 피해 이탈리아 반도를 떠돌아다니며 틈나는 대로 책상 앞에 앉아 잉크를 펜촉에 적시고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땅속으로 들어가 지구를 관통하여 지구 반대편에 거대하게 솟은 산에 오른 후, 비운의 연인 베아트리체와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는 엄청난 스케일의 여행자로 거듭난다. 펜의 깃털로 날아오르는 단테의 성(姓) ‘알리기에리’에 ‘날개’의 의미가 담겨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신곡>은 망명객 단테가 무려 20년의 세월 동안 이 집 저 집 낯선 침대에서 꾼 꿈의 이야기다. 시작은 비참해도 끝은 행복하게 마감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다. 그래서 제목에 ‘코메디아’, 즉 희극이라는 말을 담았다(<신곡>의 원제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다). 그런데 단테는 ‘코메디아’가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맞잡는 시’를 뜻한다는 친절한 설명도 남긴다. 어두운 숲에서 손을 내밀면 눈부신 빛이 어루만져 주리라는 낙관적인 구원관이 깃들어 있다.

단테는 지옥의 초입에서 구더기에 시달리는 비겁한 망령들을 만나고, 지옥의 밑바닥에 내려가서는 얼음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무지하고 둔감한 망령들을 목격한다. 중립을 가장한 부동과 책임을 회피하는 침묵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반지성주의의 특징이며 지옥의 본질이다. 지옥을 돌아보면서 단테는 눈물을 흘리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정신을 놓기도 한다. 지옥을 빠져나와 도착한 연옥의 해안에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던 그의 앞에 한 무리의 영혼이 천사의 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도착한다. 이들은 죄를 씻는 고통을 천국을 향한 희망으로 견디면서, 언제 올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처럼 연옥은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공간이다. 그에 비해 천국은 온통 빛으로 이루어진 신세계다. 단테는 눈이 부셔 어쩔 줄 모르지만, 위로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시력을 느낀다. 그렇게 천국의 빛을 받아들인 끝에 그와 하나가 되는 구원의 궁극에 도달하는 순간, 단테는 문득 처음부터 자기를 이끌고 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이승으로 돌아와 <신곡>을 쓴다.

글쓰기는 망명객 단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실천이었다. 그가 남긴 대부분의 글은 망명지에서 쓰였다. 그의 글은 그가 속했던 피렌체를 넘어서고, 한때 몸담았던 정치와 사법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힘을 발휘했다. 그의 글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고 많은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했다. 그 ‘많은 사람’에는 당시뿐만 아니라 그 후로 수백 년 동안 살아온 사람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사는 우리도 포함된다.

단테가 많은 사람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그의 발길을 채운 것은 엄정한 판단보다는 따뜻한 연민 또는 깊은 슬픔이었다. 그는 이질적인 ‘다른’ 사람들,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껴안는 포용의 공동체를 꿈꾸었는데, 그 기반은 단죄가 아니라 공감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타자를 포용하는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였다. 감수성의 능력은 타성에 젖은 제도와 관습의 틀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인간 삶의 다채롭고 섬세한 결을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려는 노력으로 자라난다.

단테는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맞잡는 관계의 성취가 그의 시대에서 가장 절실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인간 중심으로 추구해온 근대문명의 황혼녘에서 서성거리는 우리가 <신곡>에 끌린다면, 그것은 단테의 과제를 이 시대의 새로운 구원의 기획으로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단테는 우리를 위해 <신곡>을 썼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읽기 어려우시다고? <신곡>이 시대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다면, 지금 <신곡>을 읽으며 마음을 열고 생각에 잠기는 일도 또한 시대의 요청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이는 <신곡>에 도전하는 일이자 또한 우리 시대에 대한 응전, 고통을 희망으로 바꿔나가는 일이다. 그게 쉽다면, 굳이 구원을 바랄 까닭도 없지 않겠는가.

박상진 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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