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의미 되새기는 '무비컬' 빌리 엘리어트 [박병성의 공연한 오후]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 월간 공연전산망 편집장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2000년대 초반 디즈니가 뮤지컬 시장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후, 다양한 '무비컬'이 등장했다. 시간과 공간 표현이 자유로운 영화를 제한된 무대 공간에서 영상을 넘어선 무대 작품으로 만들어내기는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그 어려운 과제를 훌륭히 수행해내는 작품들이 있다. 가장 모범적인 무비컬이라면 별다른 고민 없이 '빌리 엘리어트'를 꼽을 것이다. 2010년 국내 초연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세 번째 프로덕션 무대(내년 2월 2일까지 디큐브아트센터)를 올렸다.
작품 배경은 1980년대 영국 대처 수상이 집권하던 시기의 북동부 탄광촌이다.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을 알리면서 극이 시작한다. 대의와 열정에 뜨거웠던 파업 초기를 지나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조합원들은 지쳐가고, 서서히 이탈자들이 생긴다. 마을에 경찰이 들어오고, 처음에는 무심하게 노동자들을 관찰하던 경찰은 압박의 수위를 높이더니 급기야 폭력적으로 변한다. 노동자들은 패색이 완연하지만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버티는 시간이 길어진다.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 지역의 파업의 시작부터 패배로 이어지는 2년여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무대 공간인 마을은 할머니를 양육하며 먹을 것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생활의 공간이자, 노동자와 경찰이 대립하는 투쟁의 공간이며, 아이를 키우고 준비하는 미래의 공간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무대는 빌리의 집(생활의 공간)을 중심으로 벽의 너머 공간은 마을의 거리(투쟁의 공간)로 만들고 다시 벽 안으로 들어오면 권투와 발레를 배우는 체육관(미래의 공간)이 되면서 마을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자와 경찰 두 세력의 대립과 아이들의 발레 레슨을 동일 공간에서 대비시켜 보여준 노래 '연대(Solidarity)'는 영화에서 여러 신에 걸쳐 공들여 구성한 마을의 상황을 한 곡의 노래로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빌리의 아버지는 가난한 상황에서도 아들이 세상에 맞설 힘을 얻길 바라며 권투 레슨에 보낸다. 빌리는 우연히 권투 수업과 같은 공간에서 하는 발레 수업에 참가한 후 ‘계집애’들의 놀이라고 말했지만 말과는 다르게 다음 발레 레슨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그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는 빌리와,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발레 강사 윌킨슨 부인의 노력으로 빌리의 꿈을 향한 도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중심 이야기는 미래가 보이지 않은 탄광촌에서 발레리노의 꿈을 키워나가는 빌리의 성장담이다. 파업 중인 탄광촌에서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 빌리의 꿈은 가족에게조차 이해되지도 못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빌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뮤지컬에서는 '드림발레' 장면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게 한다. '드림발레'는 크리스마스 이브 체육관에 혼자 남은 빌리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맞춰 미래의 성인 빌리와 파드뇌(이인무)를 추는 장면이다. 꿈에 취해 자유롭게 춤을 추는 빌리를 가상의 성인 빌리와 플라잉 기술을 동원해 판타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에서 빌리가 제대로 된 춤을 보여주는 장면은 유명 무용수가 된 성인 빌리가 남자 백조가 되어 날아오르는 마지막 장면이 유일하다. 무용수로 성공한 빌리를 보여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아버지를 설득하는 가장 중요한 시점으로 옮겨 무대에 걸맞은 방식으로 연출해 냈다. 빌리에 대한 가능성과 춤에 대한 열정을 본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위해 배신자라고 욕하던 사람들과 함께 일터로 나간다. 아들의 꿈을 위해 신념을 굽히고 비난과 모욕을 감수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복잡한 감정이 읽힌다.
빌리의 꿈과 더불어 극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중요한 플롯은 '연대'다. 아버지의 힘겨운 결정은 장남에게조차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그때 동료들이 나서 빌리의 꿈을 위해 경비를 마련한다.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마을과, 새로운 희망을 품은 빌리. 파업이 실패하고 노동자들은 시꺼먼 지하 탄광으로 내려가지만 빌리는 패배감이 짙은 마을을 떠나 자신의 꿈을 향해 도약한다. 마을 사람들과 빌리의 대비가 강한 울림을 주는 것은 빌리의 도약이 마을사람들의 연대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연대로 하나된 마을 사람들은 이제 빌리의 꿈을 공유하며 위로받는다.
'빌리 엘리어트'는 무거운 주제를 감동적으로 끌어가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이번 공연에는 18개월 동안 트레이닝을 받은 빌리를 비롯한 아역 배우들이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주었다. 초연 연출가 스테판 달드리는 빌리 역에 대해 "마라톤을 뛰며 햄릿을 연기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빌리와 아역 배우들은 나이에 비해 벅찰 것 같은 춤과 노래,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해내 작품 외적으로도 감동을 준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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