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담은 몸짓.. "내 작품은 신체와 평면·재료가 만난 현상"
캔버스를 등지거나 옆에 세워두고 서서
양팔 휘둘러 어깨 움직이는 만큼 선 그어
붓은 손끝에 붙어있는 연장된 신체 일부
때론 깁스 한 것 처럼 팔 움직임 통제도
1976년 처음으로 '신체드로잉' 선보여
이야기나 주제가 아닌 '방식의 그림'
2022년 뉴욕서 '한국의 실험 미술전' 앞둬
"세계 유수 뮤지엄에 작품 100점 채울 것"
한국 실험미술의 거장, 신체드로잉 창시자로 불리는 이건용 화백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최근 시작됐다. 전시 제목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이건용의 동의어, ‘바디스케이프(Bodyscape)’다. ‘신체’와 ‘풍경’의 조합이다.
전시에서는 1976년 처음 ‘바디스케이프’(신체드로잉)를 선보인 이래 계속되고 있는 연작의 신작 회화 34점을, 갤러리현대 두가헌에서는 아크릴 물감, 연필, 색연필 등 다양한 재료로 완성한 종이 드로잉과 판화 작품을 선보인다.
이건용은 캔버스 안에서 무슨 대상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를 세상의 일부로 놓고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고민한다. 자신의 신체 중 어디를 축으로 어느 관절의 움직임 만큼 선을 그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붓은 손에 쥔 도구가 아니라, 단지 오른손 끝에 붙어 연장된 신체의 일부로 보인다. 때로는 깁스를 한 것처럼 팔에 부목을 대고 팔이 구부러지는 것을 통제해 어깨와 손목의 움직임만 허락하기도 한다. 군부독재 시절의 사회통제를 은유한 것이다. 그는 “그 시대가 부자연스러운 시대였지. 내가 일부러 자신을 통제해서 어떤 선이 나오는지 봤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4·19, 5·16 등이 일어나고, 이후 모든 것을 근대화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정서에는,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또 그런 관계에서 상호 협조하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어요. 단지 감정만 앞설 뿐이었지요. 당시에는 골목마다 싸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의 눈을 3초만 봐도 싸움이 벌어질 정도였어요. 서로 쳐다본다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느끼는 시대였습니다.”
이건용의 눈에 비친 사회는 근대를 넘어 탈근대를 이야기하면서도 퇴보하는 듯한 오늘날 삶의 현주소, ‘혐오 사회’, ‘분노 사회’ 풍경과 겹친다.
그는 이어 말한다.
가난했지만 그의 집에는 부친이 수집한 장서 1만권이 있었다고 한다. 책을 놓을 곳이 없어 4권을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탑처럼 책을 쌓은 기둥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책을 꺼낼 때 아들들을 불러 “얘들아 기둥 잡아라”라고 했다. 철학, 문학, 종교 서적들이 대부분이었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과 같은 책들도 있었다. 책에 파묻혀 살던 소년은 중고교 시절,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한 선생님이 수업시간 짤막하게 흘려 말하는 서양 현대철학에 호기심을 가졌고, 수업을 몰래 빠지고 독일문화원, 프랑스문화원, 인근 대학교에서 열리는 철학학회에 아버지 옷을 입고 찾아갔다. 2차 대전 이후 분출한 사상의 흐름을 좇아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듣고 싶어했고, 현상학, 분석철학을 논하는 곳에 찾아갔다고 한다.
“다 이해하진 못했겠지. 그래도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 궁금했어.”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말했다.
결국 의사가 되라는 어머니의 바람을 저버리고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소년 철학자는 군부독재 시절 한국 전위미술을 이끌었고, 2022년 세계 현대미술의 심장부라 불리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아방가르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전 참여를 앞두고 있다.
이건용에게도 허리가 굽고 어깨가 들리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아직은 끄떡없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지만, 붓질은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캔버스에 그려진 허리 굽은 한 노장의 신체 풍경도 그 시대, 그 나이, 그 순간을 산 이건용이 남기는 유일무이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깊은 사유를 품속에 숨기고, 활기차게 몸짓하고 아이처럼 잘 웃는 그가 말했다.
“세계 유수의 뮤지엄에 내 팔을 휘둘러 100호짜리 하트 100점을 걸어 채울 거다. 앤디워홀이 살아있다면 울고 갈 껄!”
다음달 31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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