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천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슬기로운 기자생활]
심우삼|정치팀 기자
통화연결음이 들린다. 최신 가요나 팝송, 클래식이 울려 퍼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냥 “뚜뚜뚜” 딱딱한 기계음뿐이다. 연결음의 박자에 맞춰 덩달아 “콩닥콩닥” 심장도 뛴다. 상대가 전화를 받을까. 전화를 받으면 무엇을 어떻게 물어볼까. 상대가 속 시원히 답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대화가 끊겨 어색해진다면 어떻게 대처할까 등등. 그 짧은 찰나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리에 맴돈다. 연결음이 뚝 끊기고 상대의 목소리가 들릴 때 심박은 정점에 다다르고, “감사합니다” 같은 인사치레와 함께 통화종료 버튼을 누를 때 다시 정상 수치로 되돌아온다. 취재를 위한 전화 한 통화는 이렇게 시작되고 끝난다.
타고나길 내향적인 사람이 기자를 했을 때 마주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상황들이 있다. 전화할 때가 대표적이다. ‘찐친’이 아니고서야 웬만해선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는 ‘일상생활’과 가족보다 ‘낯선 이’에게 더 빈번히 전화를 걸어야 하는 ‘기자생활’의 간극은 너무나도 크다. 특히 요즘같이 코로나19 팬데믹이 심한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취재가 전화로 이뤄지다 보니 성격과 직업의 불일치가 더욱더 크게 느껴진다.
통화가 끝났다고 해서 안심하긴 이르다. 질문을 쏟아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께름칙함이 있다. 누군가에게 귀찮고 성가신 존재가 된 것 같아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그런 기분 말이다. 기자의 전화를 버선발로 환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약속된 인터뷰가 아니라면 기자에게 걸려온 전화는 수신자의 인생에 예고도 없이 불쑥 끼어든 불청객에 가까울 것이다. 얼굴 한번도 본 적 없으면서 맥락과 상황을 물어보고, 이름 한번 불러본 적 없으면서 내밀한 분위기를 알려달라 하니 전화를 받는 입장에서 퉁명스럽게 나온다고 해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일평생 거절당하는 게 싫어 부탁할 일부터 만들지 말자는 신조로 살아왔거늘, 거절당할 것을 알고도 읍소하며 달려들어야 하는 기자란 직업이 가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경찰서에서 첫 수습기자 교육을 받을 때 직감했다. 기자가 천직은 아니라고. 당직 형사에게 명함 하나 주는 일조차 긴장되는 나 자신의 모습과 “옛날엔 경찰서장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는 나이 지긋한 선배 기자들의 무용담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됐다. 경찰서를 돌며 일면부지인 사람들과 만나 수납받을 사건이라도 있다는 듯이 굴어야 하는 미션은 ‘임파서블’에 가까웠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인 것 같아서 좌절하기도 수차례였다. 왜 내게는 초면인 사람과 데면데면하지 않게 말을 할 수 있는 친화력도, 한두번 얼굴 본 이와 ‘호형호제’할 수 있는 능청스러움도 없을까 자책하기도 했다. 초년생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자보다 더 기자 같은 모습을 보이는 동료들이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천성을 바꾸려 하진 않는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을뿐더러 사람이 일에 맞추는 것보다, 일이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서열’에도 맞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한들, 사람이 먼저 아닌가. 그래서 성격 그대로 ‘내향적인 기자’로 살기로 했다. 속칭 ‘인싸력’을 발산할 자신은 없어도 특유의 ‘아싸’적 기질로 한곳에 깊숙이 수렴할 자신은 있으니, 언젠가는 나와 잘 맞는 기사들과 운명처럼 조우할 거라 굳게 믿고 있다. <조선일보> 영화전문기자였던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13년 동안 작은 특종조차 하나 건지지 못한 후진 기자였다”고 기자생활을 회상한다. 인간관계를 맺고 조직생활을 영위하는 데 서툴렀던 자신의 과거를 복기하며 내린 박한 평가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기자생활을 실패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좋아하던 영화와 문학을 다루는 게 업이었고, 애독자들에게 팬레터가 올 정도로 자기 영역에서 독보적이었던 그를 감히 누가 실패했다고 할 수 있을까. 뼛속까지 기자가 아니어도, 교과서 같은 기자상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기자생활은 충분히 슬기로울 수 있다.
wu3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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