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단순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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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 출판과 관계없는 직장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고지서들을 한 장 한 장 봉투에 넣을 때나 봉투에 풀칠을 할 때, 그리고 접어서 봉할 때 나는 소리들이 아주 일정하고 규칙적인 리듬에 도달하는 순간이 있었다.
어떻게? 일이 단순해질수록 노동자는 자기 작업에 좀 더 집중하게 되고, 쉽고 빠른 방법을 궁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화된 일 속에서 우리는 창의적일 수 있고 때로는 정신적 휴식도 취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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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김영준|열린책들 편집이사
꽤 오래전, 출판과 관계없는 직장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연수를 마치고 현업에 배치된 뒤 첫 일이 고객들에게 체납 고지서를 발송하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고지서 뭉치를 출력해 오면 그걸 직원별로 분배한다. 분배된 고지서들을 봉투에 한 장씩 넣은 뒤 풀로 붙여 봉한다. 이렇게 각자 몇 백 통을 붙이고 나면 그날 우체국 가는 당번이 이를 거둬 갔다. 여기서 자동화됐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고지서 출력밖에 없었다. 이 일을 1년 동안 했는데, 윗사람들은 마주칠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런 일을 시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잘 몰랐다. 왜냐하면 작업 자체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기 때문이다. 뙤약볕 아래서 힘을 쓰는 일도 아니고, 위험하지도 않았다. 그런 편안한 일치고는 보수도 좋은 편이어서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고지서들을 한 장 한 장 봉투에 넣을 때나 봉투에 풀칠을 할 때, 그리고 접어서 봉할 때 나는 소리들이 아주 일정하고 규칙적인 리듬에 도달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면 손의 움직임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마음은 잡념이 사라져 평화로웠다.
그게 왜 그처럼 깊은 만족감을 주었을까? 그 뒤 나는 삶이 피곤해질 때마다 평화롭게 봉투 붙이던 기억으로 되돌아가곤 했는데, 결국 깨닫게 되었다. 단순 작업이 가져다주었다고 믿은 마음의 평형 상태가 실은 그 직장의 안정성을 반영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말이다. 만일 내가 임시직이었거나, 툭하면 관리자가 다가와 “왜 이것밖에 못 붙였나?”고 혼을 내는 회사였다면 이 기억 전체는 악몽이 되었을 것이다.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는 단순 작업을 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공장에서 주인공의 일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오는 부품의 나사를 죄는 것이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나사 죄는 일만 하던 주인공은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스패너로 죄어야 하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의미도 없고 파편화된 노동의 종착역은 정신병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채플린은 물건 하나를 혼자서 완성해야 ‘유기적인 노동’이고 분업으로 일부만 담당하는 것은 ‘물화(物化)된 노동’이라고 폄하한 20세기 철학자들의 교설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만 영화가 이 주제를 파고든다고 보기는 힘들다. 주인공의 정신을 파괴하는 주범은 파편화된 노동의 반복 자체라기보다는 미친 듯이 변하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임이 곧 드러나기 때문이다. 관리자가 모니터로 노동 과정을 감시하면서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한계 이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적나라한 통제 앞에서는 ‘유기적인 노동’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다.
노동의 온전함을 해체하는 것은 단순화가 아니라 관리와 통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단순 노동 자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단순 노동이 소모적이고 정신의 피폐함을 초래한다는 요즘의 선입견과는 달리, 이를 근대적이고 명석한 것으로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18세기 애덤 스미스는 분업이 왜 효율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기계의 도입을 촉진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어떻게? 일이 단순해질수록 노동자는 자기 작업에 좀 더 집중하게 되고, 쉽고 빠른 방법을 궁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산업혁명 초기 제조업 기계의 대부분이 꾀 많은 노동자들의 발명이었던 것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분업은 저절로 기계를 낳지 않는다. 중간에 노동자의 지성이라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일의 단순화는 그 지성이 출현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오직 단순화하라’가 일터의 모토가 되면 좋지 않을까. 단순화된 일 속에서 우리는 창의적일 수 있고 때로는 정신적 휴식도 취할 수 있으니 말이다. 좋은 일이란 아마 그 두가지를 다 주는 일을 말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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